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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잘 살고 있습니다
나름 잘 살고 있습니다
  • 의사신문
  • 승인 2011.09.08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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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처지에 맞게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비개고 바람 서늘해지면 난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봄에는 겨우내 비축했던 힘을 모아 새 촉을 올리고 이를 키우기 위해 몸을 째서 새 뿌리도 뽑아냅니다. 그리고 서너 달 온 힘을 다 해 뿌리와 새 촉에 어느 정도 힘을 보태주고나면 여름이 됩니다. 한 여름의 더위와 심한 습기 속에서 쉬며 힘을 모으고 8월이 지나기 시작하면 다시 겨울을 준비합니다.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새 촉을 더 키우고 뿌리도 충분히 길어집니다.

◇아래쪽이 본래의 풍란이다. 제 몸으로는 살아남을 가망이 없음을 알고 제 잎의 온 힘을 위쪽의 변변치 못한 새 촉으로 보내고 있다. 저렇게 쭈글쭈글한 상태지만 새 촉이 자리 잡을 때까지는 버틸 것이다.
올해 제가 키우는 난들은 저마다 제 분수를 알고 잘 살고 있습니다. 조용히 쉬기도 하고 혹은 새 촉을 실하게 키우기도 합니다. 심하게 몸살을 앓기도 하고 그럭저럭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저를 포함해 주변 사람들의 사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지난해 네 번이나 꽃을 올리며 그 왕성한 힘을 자랑했던 살마금은 연초에 화분을 두 개로 나누고 성장 촉진제와 거름을 충분히 주며 내심 새 촉과 꽃을 기대했었습니다. 그런데 가을이 문턱인데 아직 조금의 기미도 없습니다. 새 촉은 이미 봄에 포기를 했지만 그래도 한 번쯤 꽃대는 올라올 줄 알았습니다. 어쩌면 일 년이 넘게 햇빛 한 번 보지 못하고 형광등 빛으로 만족해야 했던 처지가 서러워서 저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크게 약해지거나 상하지는 않은 듯해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시 집으로 가져가 가을 햇빛이라도 충분히 주어야 하겠습니다.

지난해 봄에 근처 화원에서 데려와 작은 화분에 올린 어린 나도풍란은 자리를 잡고 힘차게 뿌리를 뻗더니 이윽고 새 잎까지 잘 키워냈습니다. 애초부터 키워 동료에게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1년 반을 살피다가 지난 8월 중순이 지나 그에게 보냈습니다. 외아들이 대입 준비를 위해 집을 떠나 있다니 내외가 가끔 난이라도 살피며 한 순간이라도 편안했으면 좋겠습니다.

한껏 호사를 부려 삼십만 원이 훌쩍 넘는 값을 깍지도 않고 데려온 달마 중투도 결국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데려올 때 본래 작은 새 촉이 올라오고 있어 세심하게 보살피고 있었는데 결국은 자라기를 멈추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옆에서 다른 촉이 올라와 반쯤 자랐습니다. 잎 가운데 세로방향으로 흰 무늬가 화려하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 중투와는 무늬가 반대인 달마 복륜 역시 올해 다시 새 촉을 올려 키우고 있습니다. 지난해 올라왔던 두 촉은 이미 다 자랐는데 잎 모양과 무늬가 그리 만족스럽지는 못합니다. 아마도 환경이 변해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올 해는 한 촉만 올렸습니다. 잎 가장자리의 흰 무늬가 아주 훌륭합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5년 넘게 가슴을 졸이며 지켜보고 있는 작은 나도풍란은 지금 벼랑 끝까지 몰려 있습니다. 올 봄에 새 잎이 올라오고 젖니 같은 뿌리도 솟으며 제법 기운차게 자라기에 이제부터는 잎의 수도 좀 늘고 커져서 제 몫을 할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여름이 시작될 때까지는 그랬습니다.

7월 장마가 한창이던 어느 날 자라기 시작하던 뿌리가 썩어버린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근처의 검은 반점. 장마철의 높은 습도와 온도를 이기지 못한 것입니다. 물을 끊고 두 주쯤 지났는데 이 연약한 풍란에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뿌리 근처에서 바늘 끝만큼 작은 생명이 자라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 달이 지난 지금 그 미세한 새 촉이 자라면서 어미 촉의 잎은 조금씩 주름이 잡히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있습니다. 언젠가 저 새 촉이 혼자서 클 수 있을 때가 되면 툭 떨어져 버리겠지요. 새 촉이 자라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마치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처럼.

오근식〈건국대병원 홍보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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