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8 19:45 (목)
항공의학연구소를 창설한 - 최재위
항공의학연구소를 창설한 - 최재위
  • 의사신문
  • 승인 2011.09.01 13: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비뇨기과학 기틀 마련 및 공군 군진의학 정립 앞장

최재위(崔在緯)
최재위(崔在緯)는 1908년 함경남도 함주군에서 태어나 1966년 서울에서 사망한 한국의 비뇨기과학과 항공의학의 개척자이다. 함흥고등보통학교를 거쳐서 1928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 입학하여 1935년 졸업하였고, 1940년 경성제국대학 미생물학교실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선생은 졸업 직후부터 1940년까지 경성제국대학 피부비뇨기과 교실의 부수 및 조수로 근무하면서 동대학 미생물학교실에서 결핵균에 관한 연구와 임균배양 및 화학요법과 그 내성에 관한 연구를 하였다. 1940년 한국인으로서는 드물게 강사로 임명되어 비뇨기과 강의를 하였으나 그 당시에는 일상적이었던 차별정책에 따라 같은 해에 사임하였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피부비뇨기과의원을 자영하였다. 1946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교수로 취임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피부비뇨기과로부터 분리되어 명실상부한 외과의 특수분야로 발족한 비뇨기과학교실의 초대 주임교수로서 교직원을 보강하고 외래와 병동 공간을 확보하여 본격적인 교육, 연구, 진료의 터전을 마련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1949년 대학 안팎의 혼란과 갈등 상황에서 3년 동안의 봉직 끝에 사임하였다.

선생은 1950년 6·25 전쟁 중에 육군군의학교를 거쳐 공군에 입대하였다. 군의관 복무 기간 중 1954년부터 6년 동안 공군 항공의학연구소장으로서 연구소의 초석을 다지고 군진의학의 주요 분야로서 위상을 정립하였다. 선생은 1955년 구미제국의 항공의학연구소를 시찰하였고 연구소 건설구상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미국의 웅대한 규모에는 엄두도 낼 수 없었는데 영국의 연구소는 아담하고 한국의 현실에 맞고 실질적으로 참고 할만하다고 보고하였다.

본격적인 항공의학 연구에 필요한 인체용저압실, 저온실과 인체시험원심기 등 기반 시설장비를 설치하고 우수한 연구자를 모아 연구소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켰고 활발하게 연구활동을 하였다. 또한 그 당시 국내에 연구시설이 열악한 상황에서 각 대학의 학자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였고 연구 분위기를 고양하였다.

항공의학 잡지를 통하여 발표된 주요 논제는 저산소증 등 항공의학의 생리, 병리학에 관한 것과 황색포도상구균이나 결핵균의 항생제 내성 등에 관한 것이었다. 1971년 항공의학 연구원에 항공의학연구실이 신축되었는데 선생의 선구자적 업적을 기념하여 최재위박사기념관으로 명명하였다. 1960년 전역하여 중앙방역연구소장, 국립소록도병원장, 국립노량진정신병원장과 국립보건원 교수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사회경제적으로 어렵고 혼란한 때에 국립 보건의료기관의 책임자로서 새로운 기구를 도입하고 장비를 보완하면서 효율적으로 운영하였고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선생은 다재다능한 분이었고 59년의 길지 않은 일생동안 의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각기 다른 직위를 가지고 선구자적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첫째,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된 비뇨기과학교실의 초대 주임교수로서 교육, 연구 진료의 터전과 제도를 만들었다. 그의 아들 최황이 대를 이어 비뇨기과 교수가 되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소아병원인 서울대학교 어린이병원의 초대 소아비뇨기과 분과장이었던 것은 특기할 만 하다. 둘째, 선생은 공군에 입대하여 초창기의 항공의학 연구소장으로서 모양과 내실을 갖춘 연구소로 육성하였고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또한 공공보건의료기관의 책임자로서 보건행정 분야에서 모범적으로 기여하였다.

집필 : 이종욱(서울대 명예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