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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선진외과학 도입을 선도한 - 민광식 
1950년대 선진외과학 도입을 선도한 - 민광식 
  • 의사신문
  • 승인 2011.08.25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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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 세부 전문화·수련과정 개편 등 현대화 주역

민광식(閔珖植)
민광식(閔珖植) (1912∼1979)은 8·15광복과 6·25한국동란을 전후하여 혼란스러운 우리나라 사회여건 하에서 근대 미국의학을 근간으로 우리나라 외과학의 틀을 만드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의료계의 거두이다.

선생은 제2고보(경복중고등학교 전신)를 거쳐 1936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1955년 세브란스의과대학의 외과학 교수로 취임하기까지는 8·15와 6·25의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세대들과 궤를 같이 한다.

우리나라 의학은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여명기를 열었으나 일본강점기가 본격화하면서 경성의전, 경성제대 등의 관립 의료기관을 주축으로 독일의학의 전성기가 되었고,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선교사들이 축출되어 미국의학은 사실상 실종되었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졸업 후 평양연합기독병원에서 1937년부터 1941년까지 외과 임상수련을 마친 후 일본 나고야의대 외과에서 연구원생활을 포함하여 세브란스의전 병리학교실원으로 3년간의 기초의학 연구경력은 장차 1947년 교토대학 의학부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무렵 5년간 (1945∼1950) 선생은 서울교통병원(서울철도병원의 전신) 외과과장으로 봉직하면서 이화여대 외과학교수로 겸직을 마치고 세브란스병원 외과로 전직하였으나 곧, 6·25 전쟁으로 군의관에 임관하게 되었다.

1952년부터 1955년까지 미국 피츠몬드 군병원(Fitzmond Army Hospital) 과 펜실바니아의대대학원에서 외과학연수를 받는 동안 당시로서는 최신 미국외과학을 경험하게 되었다. 1955년 귀국시에는 이미 미국외과학회 정회원(FACS)이 되었고 당시 외과학 교수진의 확보가 절실한 세브란스병원 외과과장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미국연합선교재단으로부터 세브란스병원에 파송된 미국 외과의사들과 6·25 이후 미국에서 외과의 각 분야별로 연수받고 귀국한 인재들을 맞이하여 외과학교실의 중흥기를 이루게 된다. 당시 교실 내에는 10명의 미국외과전문의가 담당 세부전문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게 되며 교외로부터는 전주, 광주, 원주에 있는 각 기독교병원에 근무하는 미국 외과전문선교사들도 학술과 수련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또한 일반외과교실에 소속되었던 마취과와 신경외과를 분리시켰고 교실 내에서도 흉곽외과와 소아외과, 성형외과, 일반외과로 기능에 따라 역할을 분리하여 세부전문화하였다. 이와 같은 발전은 국내 외과학계에 새 바람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에 따라 수련과정도 다양화되었는데 당시 국내 의과대학 졸업생들이 세브란스병원에서 수련받기를 선호하였고 교실은 학연에 얽매이지 않고 문호를 개방하여 타교 출신의 외과전문의를 많이 배출하게 되었다.

또한 육군과 공군의 장기근무 군의관요원의 외과연수도 군당국과의 협약에 의하여 짧게는 1년, 길게는 수련의 전 과정을 끝낼 수 있게 제도화하였는데 이들 대상자 중에는 연세의대와 서울의대 출신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선생의 임상활동은 암외과로 주로 위암과 대장암에 집중하였고 1964년에 이미 위암수술환자들의 장기생존율을 보고한바 있다.

자연히 암수술에 대한 사회적 지명도가 높아 자유당 말기와 유신정권하에서도 고위 정객들의 암수술을 집도하였다.

학회활동도 활발하여 1956년 대한마취학회를 창립, 초대 회장에 피선되었고 1965년에는 대한성형외과를 창설하고 초대회장을 지냈다.

1960년 대한외과학회 회장으로 취임하였고 이때에 홍필훈 교수의 도움으로 미국외과학회(ACS)의 규약을 참고하여 우리 실정에 맞게 외과학회 회칙을 개정, 발전시켰다. 이때부터 대한외과학회는 1947년부터 있던 회장-간사, 또는 회장-총무 중심제도가 이사장 중심제도로 바뀌게 되었다.

연세의대 학장(1968∼1970) 재임시에는 의과대학의 새로운 의학교육제도 개발을 추진하였고, 우리나라 최초의 연세암센터의 설립을 주도하였다. 이어서 의무부총장 겸 의료원장의 중책을 맡아 어려운 시절 연세의료원의 큰살림을 주관하여 행정관리능력을 발휘하였다(1970∼1972). 의료원장직을 끝으로 화려했던 18년간에 걸친 연세의대 교수직을 종료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선생은 뛰어난 비전과 리더십을 발휘하여 6·25 이후 미국의 선진 외과학의 도입에 선도적 역할을 한 의료계의 거두로 외과 전문분야의 발전과 수련과정의 개편 그리고 대한외과학회에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는 큰 업적을 남기었다.

집필 : 이경식(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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