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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봉사의 표상 - 장기려
의료 봉사의 표상 - 장기려
  • 의사신문
  • 승인 2011.08.25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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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복음병원 설립 등 사회복지 활동 한평생 

장기려(張起呂)
장기려(張起呂)는 장운섭의 차남으로 1911년에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다. 1928년에 개성에 있는 송도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를 1932년에 졸업하였다.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에서 조수와 강사를 거쳐서 평양에 있는 기홀(연합기독)병원에서 외과과장(1940∼45)을 하였다. 광복 후 평양도립병원 원장을 한해 하였으며, 1947년부터 평양의과대학 외과교수 겸 과장을 하였다.

1950년 말 차남만 데리고 월남한 장기려는 부산 제3육군병원에서 반년 근무한 후, 부산에서 무료의원을 설립하여 복음병원으로 되었는데 1976년까지 원장을 하였다(그 후 복음병원을 모체로 고신의대가 설립되었다). 복음병원에 간호전문대학을 설립하여 1968년부터 1979년까지 학장을 하였다.

그 동안에 서울의대 교수(1953∼56), 부산의대 교수 및 학장(1956∼61), 가톨릭의대 교수(1965∼72)를 역임하였으며, 1979년부터 1994년까지는 인제의대 부산백병원 명예원장을 하였다.

1959년에 국내 최초로 간암에 대한 대량 간절제술을 시행하였으며, 1974년에는 한국간연구회를 창립하여 초대회장을 역임하였다. 1975년에 청십자병원을 설립하여 1983년까지 원장을 하였으며, 부산아동병원 원장 겸 이사장(1976∼93)을 역임하였다.

1968년에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하고 대표이사를 맡아서 임의보험인 청십자의료보험 활동을 하여 전국민의료보험이 된 1989년까지 활동하였다.

1976년부터 한국청십자 사회복지회를 만들어 사회복지활동을 하였으며, 그 후 사회복지법인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활동을 하게 된 것은 장기려를 존경하는 동료와 후학 등이 그를 중심으로 모여 일을 하였기에 가능하였다. 장기려는 동시에 여러 기관의 장을 맡았으나, 그는 경영자로서가 아니라 이러한 활동을 하는데 정신적 지주로서 역할을 담당한 셈이다. 그는 청빈한 박애주의자였지, 결코 경영자는 아니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장기려는 외과의사로서 명의였지만, 의사로서 인술을 베푸는 데 있어서 봉사의 표상이라 할 수 있겠다. 뿐만 아니라, 북녘에 부인과 가족을 두고 온 이산가족으로서 민족분단의 희생자를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로 자리매김하였다. 결국 부인과 생이별을 한 채 독신생활을 하다가 1995년 성탄절에 작고하였다. 아들 장가용이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 해부학교수로 일하다가 정년퇴임하였다.

의료활동, 사회봉사활동 그리고 청십자운동 등을 한 장기려는 국민훈장 동백장(1976), 적십자 인도장 금상(1978),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1979), 국제라이온스 인도상(1981), 제1회 호암상 사회봉사부문(1991) 등 각종 상을 수상하였으며,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그를 추앙하는 동료와 후학들이 1997년에 성산장기려기념사업회(이사장 이영덕, 부이사장 김윤범, 백낙환, 손봉호)를 설립하여 노숙자 무료진료와 기념강좌 등을 하고 있다. 평화와 사랑(규장문화사, 1980), 나의 회고록 등의 저서 등이 있다.

집필 : 유승흠(연세의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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