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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뇨기과학을 개척한 - 이학송 
비뇨기과학을 개척한 - 이학송 
  • 의사신문
  • 승인 2011.08.18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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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뇨기과학 첫 교과서 발간·국제화에 크게 기여

이학송(李鶴松)
이학송(李鶴松)은 1907년부터 1981년까지 생존하였던 비뇨기과학 학자이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점당하기 시작할 무렵인 1908년 평안남도 개천군에서 출생했다. 1939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교수직을 시작하여 1969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교수를 마지막으로 정년퇴임할 때까지 37년간을 대학교수로 근무하였다. 이학송은 비교적 말이 적으나 성품은 온화하며 동료들과의 관계에서도 편협함이 없는 원만한 인격의 소유자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학송은 1928년 서울 보성고보 졸업 후 1932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36년 일본 교토대학 피부비뇨기과에서 연구 후 1939년 의학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였다. 선생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로 봉직하고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세브란스병원장을 역임한 바 있다. 이학송은 1949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비뇨기과학교실 2대 주임교수로 취임하여 광복 후 막 태동된 초창기 한국 비뇨기과 의학분야의 교육, 연구와 진료 분위기에 활력을 불어넣고 이를 공고히 하는데 매진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부산으로 피난을 간 12월초 이학송은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병원 비뇨기과에서 미국의 의학과 의학제도의 장점을 수학하기 위해 도미하였다. 이학송은 1952년초 귀국한 후 미국에서 연수한 최신 지견을 토대로 우리의 비뇨기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이학송은 전쟁으로 큰 타격을 입고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주위환경을 복구하고 병원 연구실과 동물실험실을 정비하고 연구에 박차를 가하였다. 갖은 우여곡절 끝에 정상궤도에 오르게 되면서 이학송교수는 우리나라 비뇨기과학계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우선, 비뇨기과 교과서 편찬을 서둘러 1957년 `최신비뇨기과학'교과서를 출간하였다. 이는 참고할 만한 외국 교과서도 많지 않은 시대에 초독회를 통하여 집필 자료를 준비한 이학송의 치밀하고도 정력적인 노력과 자발적인 재정적 부담으로 얻은 결과이었다. 이는 당시 한국 최초의 의학교과서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둘째, 1954년 비뇨기과학회가 분과학회로 독립하면서 이학송은 초대 회장직을 맡아 학회발전에 기여하였고 학회지도 창간하였다. 국제적인 활동으로 1967년 7월 독일 뮌헨에서 개최된 14차 국제비뇨기과학회에 참석한 이학송은 한국지부의 승인을 얻었다. 이로서 대한 비뇨기과학회가 국제학회의 정식회원으로 가입을 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이학송 선생의 선구자적 삶은 첫째, 광복 후 막 태동한 비뇨기과학 분야의 위치를 공고히 하여 현재의 비뇨기과학이 발전하게 된 초석을 놓았고, 한국전쟁으로 혼란하던 시기에 비뇨기과학 분야의 안정된 기반을 닦았다는 점일 것이다. 둘째, 비뇨기과학 교과서를 최초로 만들어 한국 비뇨기과학 교육의 초석을 놓았으며 초창기 비뇨기과학회지를 창간하고 내실의 기틀을 닦았다는 점이다. 셋째, 한국의 비뇨기과학 분야에 국제적 교류의 씨앗을 뿌렸고 이러한 노력이 이후 이 분야의 국제화로 이어져 오늘날에 이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는 점이다. 이학송은 1981년 71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집필 : 백재승(서울의대 비뇨기과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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