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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의학을 개척한 - 이영춘
농촌의학을 개척한 - 이영춘
  • 의사신문
  • 승인 2011.07.22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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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첫 보건소 설립 등 보건위생 개선 한평생

이영춘(李永春)
이영춘(李永春)은 1903년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이종현의 5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평양고등보통학교 및 동 사범과를 졸업하여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1929년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생리학 조교를 거쳐서 황해도 평산에서 3년간 개원하다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병리학강사로 부임하였다. 윤일선교수의 지도를 받은 이영춘은 1935년에 교토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한국인 지도교수 밑에서 받은 최초의 한국인 의학박사이다.

의과대학 졸업식 때 에비슨 교장의 훈사(… 병들어 고통 받는 사람을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병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입니다… 공중보건은 어떤 의미에서 의학이 추구하는 최종 목표인지도 모릅니다…, 1929)를 좌우명으로 간직해 온 이영춘은 농촌에서 개원하면서 가난과 무지 그리고 비위생적인 한국의 농촌에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마침 평양고보 은사이자 경성제국대학의 교수 겸 학생과장의 소개로 큰 뜻을 품고 1935년에 전북 옥구 구마모도 농장의 자혜진료소장으로 부임하여 농장 소속 소작인 2만 명을 대상으로 무료진료를 하였다.

현지에서 결핵 및 각종 전염병에 대한 예방의학적인 연구사업을 하였으며, 학교 교사를 대상으로 학교위생에 관하여 교육하는 등 학교보건사업을 벌였다. 1940년에는 일본인 농장 주인을 설득하여 초등학교 결식아동을 대상으로 학교에서 도시락을 주도록 하여 우리나라 학교급식의 효시가 되었다. 우리나라 농민들의 보건과 위생을 주제로 하여 학술적인 조사와 연구를 할 꿈을 가지고 있던 이영춘은 농촌위생연구소 및 결핵요양소를 설립할 것을 조건으로 농장에 부임하였기에 재단법인 설립을 제출하였으나 조선총독부에서 반려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광복이 되어 군산도립병원장을 겸임하였으며 대한의학협회 조직위원, 옥구군의사회장 등으로 일하였다. 1948년에는 개정농촌위생연구소를 설립하였다. 1951년에는 학술지 `농촌위생'을 창간하였다. 1950년에는 6·25발발과 함께 부산에서 국립경찰병원 창설에 참여하였다. 농촌에서 보건인력의 부족을 타개하기 위하여 개정고등위생기술원양성소(개정간호학교, 개정간호전문대학의 전신)를 1951년에 설립하였으며, 1955년에는 화호여자중학교를 설립하였다.

아울러 민간기관으로는 최초로 1954년에 개정보건소를 설립하였으며, 1957년에는 일심영아원을 설립하는 등 지역사회보건을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하였다. 1958년에는 사단법인 대한공중보건협회 이사장, 1960년에는 대한기생충학회 회장, 대한위생동물협회 회장, 1964년에는 대한기생충박멸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사회활동으로 군산로타리클럽 초대회장, 국제로타리 377지구(전라남북도) 총재 등을 역임하였다. 연세대학교에서 1958년에 사회봉사 공로 표창을 받았으며, 대한의학협회 창립70주년 기념공로패를 받았다.

부지런할 뿐더러 집념과 일에 대한 욕심이 대단하였던 이영춘은 일평생을 농촌에 심은 그의 진료 및 예방의학 그리고 사회봉사에 대한 공로로 1963년에 대한민국문화훈장(대통령장), 1970년에 대한적십자사 박애장 금장 등을 받았다. 78세를 일기로 1980년에 작고한 이영춘은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다. 그의 사위이자 심장내과의사인 이주철은 소련의 하브로브스크에서 의료선교 중 1995년에 순교하였다.

집필 : 유승흠(연세의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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