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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진의학의 토대를 다진 - 윤치왕
군진의학의 토대를 다진 - 윤치왕
  • 의사신문
  • 승인 2011.07.07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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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군의학교 교장 역임·의무대대 편제 등 수립

윤치왕(尹致旺)
남포(南圃) 윤치왕(尹致旺)은 1895년에 태어났다. 아버지 윤응렬은 무과에 등과하여 군부대신과 육군부장 등을 지냈다.

윤치왕은 송도고등보통학교와 개성에 있는 한영서원에서 수학하였고, YMCA에서 중학교 일어과정을 마치고 관립수원농림학교(서울농대전신)를 1911년에 입학하였다. 맏형 윤치호가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후 중국으로 망명을 하였다가 다시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기에 윤치왕은 1913년에 중국 북경으로 망명하여 군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언더우드선교사의 주선으로 1914년에 윤보선과 함께 영국으로 가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글래스고대학교 의과대학을 1925년에 졸업한 후, 에든버러에서 2년 간 산부인과 수련을 받았다.

학비 일체는 언더우드선교사의 형이 설립한 언더우드타이프라이터회사 영국지점을 통하여 언더우드가 조달해 주었다.

1927년에 귀국하여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산부인과 허스트교수 밑에서 훈련받은 후 1931년에 조교수가 되었다. 1934년에는 교토대학에 가서 2년간 산부인과를 공부하고 2년 뒤에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44년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그만두고 경상북도 김천에 있는 구세군병원에서 일하였다.

광복이 되자 윤치왕은 자가용승용차를 손수 운전하고 다녔으며, 오한영, 전용순, 정보라 등과 같이 골프를 치기 시작한 온화한 성품을 가진 영국신사였다.

영국에서 배운 댄스는 당시 사교계에서도 알아주는 실력이었으며, 테니스도 수준급이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 설립되자 심호섭 학장과 함께 윤치왕은 서울대학교 제2병원 원장으로 임명받아 3년간 일하였다.

어려서부터 군인이 되고 싶었던 윤치왕은 정부가 수립된 후 1949년에 육군에 입대하여 군의관 중령으로 임명되었고, 그 해 늦가을에 여수순천반란사건이 일어나자 의무감으로 진압작전에 참가했다.

그 공을 인정받아 윤치왕은 1950년에 대령으로 승진되었으며, 이듬 해에는 준장으로, 그리고 1953년에는 육군소장으로 승진하여 육군군의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가 군에 재직중 사단에 의무대대 편제를 만들었으며, 군에 의지제작창을 설립하여 부상당한 군인들에게 의지(義肢)를 만들어 제대시켰다. 10년동안 군에서 일한 윤치왕은 64세로 1959년에 전역하였다.

당시에 윤치왕은 중국어, 일본어,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였으며, 영국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한 유일한 사람으로서, 영국식 교육을 받고 귀국하여 미국식 의학으로 운영되는 기관에서 한국의학을 발전시키는데 기여하였다. 특히 군진의학을 발전시켜 토대를 만든 지도자였다.

윤치왕은 대한산부인과학회 회장, 대한결핵협회 회장, 대한의학협회 회장, 서울시의사회 회장 등을 맡아서 한국의학계를 위하여 조용히 기여하다가 1982년 87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아들 윤도선(서울의대 졸업)이 산부인과, 손자 윤양구(연세원주의대 1986년 졸업)이 흉부외과 의사이다. 병리학 교수로 서울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윤일선이 윤치왕의 조카이다.

집필 : 유승흠 연세의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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