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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극복기<7> 김남균 세브란스심장혈관병원 조교수
암 극복기<7> 김남균 세브란스심장혈관병원 조교수
  • 홍미현 기자
  • 승인 2011.07.04 10: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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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네살 소년이 맞은 죽음의 공포가 의사 만들어”

 

세브란스 심장혈관병원 김남균 임상 조교수는 중학생이던 14살 때 소아암의 일종인 `비호지킨스 림프종 4기' 판정을 받고 1년간 투병생활을 했다. 이런 비호지킨스 림프종은 김 교수에게 삶과 죽음에 대한 고통과 공포를 가져다 준 반면 `의사'의 길로 들어서는 큰 역할을 했다.

그러면서 `조기검진'과 `건강검진'의 중요함을 어릴 때부터 몸소 느끼며 살아왔다. 그는 매년 1년에 한번씩 검진을 통해 `건강'을 체크하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의사가 되기 전 암투병을 겪고 암의 공포와 검진의 중요함을 느낀 김남균 교수의 이야기를 다루고자 한다. 

■14살에 찾아온…죽음의 `그림자'

한창 넓은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땀을 흘리고 해맑은 어린 웃음을 지어야 할 나이 14살. 김남균 교수에게 중학교 2학년이던 14살은 `악몽'과 `공포'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어느날부터 김 교수는 속쓰림과 구토 그리고 원인모를 빈혈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신체의 변화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계단을 한 층 한 층 올라갈 때마다 차오르는 가쁜 숨. 온 몸이 천근만근처럼 느껴지는 몸으로 계단 한번 오르다 보면 `기진맥진'하는 것은 다반사였다.

그는 좋아하던 `축구'도 `농구'도 그리고 친구들과 뛰어노는 것도 쉽지 않았다. 김 교수가 모르는 사이 온 몸에 퍼져있는 `혈액암' 때문이었다. 당시 그는 `비호지킨스 림프종'을 앓고 있었다. 그것도 4기. 14살이던 그에게 `암'이라는 존재는 `죽음'으로 다가왔다.

김 교수는 “중학생이었기 때문에 `암'이라는 존재와 두려움에 대해 알고 있었다”며 “과연 내가 살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휩싸이면서 `죽음'이라는 그림자가 너무 크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주치의였던 유철주 교수께서 치료를 잘 받으면 좋아진다는 말을 했었는데 안심이 되면서도 무서움을 감당해 내기 힘들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그는 처음부터 내 병명을 잘 못 알고 치료한 것이 끔찍한 상황을 만들어 낸 것 같다고 후회했다.

■의원·한의원의 `안일한' 치료가 `암' 키우는데 `한 몫'

김 교수가 몸의 변화를 느끼고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대학병원이 아닌 동네 종합병원이었다. 김 교수는 병원에서 위장촬영을 했고 `위궤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병원 주치의는 `위궤양' 치료를 위한 처치 및 치료를 했다. 이는 김 교수의 증상이 위궤양 증상 시 나타나는 메스꺼움, 체중감소, 빈혈 그리고 위의 통증을 호소해 왔기 때문이다.

이런 치료는 1년 6개월간 계속 진행됐다. 하지만 꾸준한 치료에도 불구하고 증상이 호전되기는커녕 더욱 악화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그의 증상을 더욱 나쁘게 한 것은 한방치료였다. 한의원을 찾아 뜸 치료를 병행 한 것이다.

아마도 모든 환자들이 그렇듯이 `낳을 수만 있다면'이라는 희망으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 때문이었던 것 같다. 김 교수의 이런 행동은 시간을 허비하고 몸만 축낼 뿐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빈혈은 더욱 심해져 얼굴이 창백해 갔고 속 쓰림과 구토 증상도 많아졌다. 여기에 피로도 쉽게 느껴졌던 것은 물론 체력도 눈에 띠게 떨어져 몸무게도 줄어들었다. 그제서야 김 교수는 심각성을 판단, 세브란스 심장혈관병원에서 세부적인 검사를 시작하기 시작했다.

김 교수는 “2년간의 동내병원과 한의원에서의 치료가 병을 더욱 키웠던 것 같다”며 “처음부터 진단을 제대로 받고 치료했다면 4기라는 진단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의 `눈물'…“죽을 수 있겠구나”

심장혈관병원은 김 교수의 가장 심각한 증상이었던 `빈혈'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뼈스켄, CT, 복부 초음파 등을 시행했다. 결과는 비호지킨스 림프종(백혈병-소아암) 4기였다. 즉, 혈액암으로 전신에 퍼져있던 상태였다.

당시 김 교수는 어린 나이었기 때문에 직접 병명을 듣지는 못했다. 부모님을 통해 자신이 `암'이며 `전신'에 퍼져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순간 그는 자신의 병이 심각하다는 것을 느꼈다. 치료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아버지의 눈물을 봤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현재 내가 아버지가 된 입장에서 당시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비통하고 고통스러웠을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며 “네게 그 말을 하기 위해 무거운 입을 때기란 쉽지 않았을 것 같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암이라고 진단되니깐 어린 나이에도 죽음이 두렵다는 생각이 들면서 아버지의 눈물을 보니 `죽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했다.
하지만 그에겐 `선택'은 없었다. 약물치료를 꾸준히 하는 방법 이외엔 말이다.

 

중학생 시절 원인모를 빈혈 시달리다 `비호지킨스 림프종' 선고
 병원이 너무 싫었지만 아이들 아픔 치료하는 의학도의 길 선택
 철저한 추적 검사와 웃음으로 환아들과 희망 공유하며 건강지켜

 

■항암치료 70%완치…`의학도' 꿈 변경

항암치료는 14살이라는 소년이 감당하기엔 버거웠다. 특히, 친구들의 `따가'운 시선은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김 교수도 항암치료를 받는 모든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은 물론 입안의 염증과 구토는 참기 힘들었다. 체력은 바닥이 났고 몸무게는 자연스레 10Kg 이상 빠졌다. 이런 체력으론 학교를 다니기 어려울 정도였다.

김 교수는 “정상적인 아이들과 같이 등·하교를 한다는 것이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 때였는데 유철주 교수가 유급을 반대하며 졸업을 권유했다”며 “지금 생각하면 유 교수님께서 좋은 결정을 해 주셨던 것 같다”고 했다.

김 교수는 “출석과 졸업을 목적에 두고 학교를 다녔다”며 “체력회복을 위해 구토를 해가면서도 닭고기 섭취를 꾸준히 해 체력을 유지했다. 그리고 1년 넘는 항암치료 과정이 힘들었지만 다행히 항암제 치료에 잘 반응해 70% 이상의 완치 판정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완치판정 뒤에도 체력이 회복되지 않는 등 몸이 많이 상해 있었으나 다행히 공부하는데는 크게 지정이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과학고 진학을 목표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2학년 과정을 미리 습득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처음부터 의사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문과'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병원에서 너무 힘들게 치료받은 기억 때문에 병원자체가 너무 싫었던 것도 한몫했다. 그러나 고3이 되던 해, 크게 아팠던 경험이 그를 의학도의 길로 이끌었다. 졸업 뒤에도 자신의 경험을 살려 어린 아이들의 아픔을 돌보는 소아과를 택했다. 특히 그는 병원에서 전공이 과정을 할까 고민하다 치료받았던 세브란스병원에 지원, 어릴 적 주치의였던 유철주 교수에게 의업을 배워나가는 행운을 얻게 됐다.

■아프고나니 검진 `중요성' 절실히 느껴

현재 그는 소아암 판정 이후 치료를 받은 지 20년이 넘었다. 암 재발 시기는 지났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재발의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지금도 일 년에 한번씩은 추적관찰 검사를 받고 있다.

특히, 예전과 같이 소화가 안 된다거나 속이 답답할 땐 어김없이 바로 검진을 받는다. 김 교수는 “기존 병력이 있다 보니 조금만 몸에 이상이 있어도 바로 검진을 받고 있다”며 “아마도 직업이 의사이다 보니 의학 지식이 많아 더욱 그러는 것 같다”고 했다.

김 교수는 “모든 의사들이 그렇겠지만 대부분이 자신이 병원에서 근무하다 보니 필요할 때 언제나 검사를 할 수 있다는 생각과 별거 있겠어(?)라는 생각이 병을 키우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어릴 적 큰 경험을 하고 보니, 건강에 대해 더욱 신경을 쓰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인생 한번 살지 두 번 사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검사의 중요성을 느끼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경험으로 환자에게 다가가는 `소아과'의사

김 교수는 소아암으로 병원을 찾은 아이들과 보호자들에게 자신의 사례를 들려줘 희망과 용기를 넣어주는 `의사'이다.

김 교수는 “환자들을 보면 얼마나 절망적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보호자나 암을 앓는 아이에게 치료의 고통 등도 환자에 대해 입장에서 훨씬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과거보다 많이 개선됐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항암제의 부작용에 대해서도 차근차근 알려준다.

김 교수는 “질병도 하나의 성장 과정이 될 수 있으니 함께 이겨내 보자고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최선을 다해 치료하려는 마음을 전달해 주고 있다”며 “여기에 웃음도 잊지 않고 건 낸다”고 했다. 이는 어떤 치료보다 자신을 치료해 주는 의사의 따뜻한 웃음이 절망을 안고 있는 환자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을 실어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홍미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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