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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극복기<3> 김선규 연세가정의원 원장 
암 극복기<3> 김선규 연세가정의원 원장 
  • 홍미현 기자
  • 승인 2011.06.07 1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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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사랑했던 나에게 날라온 경고장 직장암” 

 

■눈앞이 하얀 것이 마치 ‘천국’에 온 느낌

인생을 살면서 `천국'과 같이 온 세상이 하얗게 보인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또, 누군가 고의적으로 내 뒤통수에 충격을 가한 것처럼 머릿속이 멍해지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왜 많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 내가 암에 걸려야 해? 혹시 진단이 잘못 내려진 거 아냐?” 라며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실을 외면하려는 그와 달리 `암'은 이미 자연스레 그의 몸과 하나가 되어있었다. 술과 육식 그리고 바쁘다는 핑계로 무심코 넘긴 건강검진과 운동을 하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술과 사람이 좋아 즐긴 `이것'…“암을 부르다”

김선규 원장은 술을 마시는 것을 좋아하고 사람과 어울리는 것 또한 좋아했다. 그래서 매일 이 두 가지를 함께 즐겼다.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넘치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고. 이것이 그에겐 `암'이라는 질병으로 나타났다.

김 원장은 “그땐 정말 술을 좋아했던 것 같다. 어느 정도였냐면 일주일 내 술을 안 마시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면 말 다한 거 아니냐”며 “가끔은 잠을 한 숨도 자지 못한 채 병원으로 바로 출근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소위말해 당시 김 원장은 `술꾼'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술을 좋아하니 자연스레 고기를 즐겨먹게 됐다. 이런 생활이 지속되다 보니 그의 몸도 지쳤었나 보다. 김 원장에게 빨간 불을 켜며 `적신호'를 보냈다. 어느날부터 `설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김 원장은 `설사'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예전에도 술이 과하면 다음날 설사를 했기 때문에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번만은 달랐다. 계속 되는 설사로 거의 매일 갖던 술자리도 보류하며 상태의 호전을 기다렸지만 일주일째 지속됐다.

김 원장은 몸이 보내는 신호조차 무시했다. 아마 의사라는 직업 때문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놔두면 괜찮아지겠지라는 판단에 병원 가기를 미루었던 것이다.

■단식투쟁선언한 두 아이들이 살려낸 내 `생명'

그러던 어느날, 김 원장은 진료 중 한 통화의 전화를 받게된다. 초등학생이던 두 아이들의 전화였다. 계속되는 설사에 가족들이 병원에 가보라 재촉했지만 연신 괜찮다며 병원가기를 미루자 아이들이 나섰던 것이다.

김 원장은 “당시 두 아이들은 `병원에 가지 않으면 단식투쟁을 할 꺼야`라며 통보해 왔다”며 쓴 웃음을 보였다. 그는 그 날을 회상하며, 만일 가족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김선규`는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김 원장은 병원 근처 방사선의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당시 담당의가 종합병원에서 재검사를 받을 것을 권유, 몇일 후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는 `직장암'이었다. 김 원장은 방사선의가 종합병원에서 재검을 권유했을 때 혹시나 `암'이 의심되는 무언가가 발견됐구나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현실로 되고 보니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고 말했다.

■`암' 믿고 싶지 않은 사실…“외면하고 싶었다”

1997년 5월, 벚꽃이 만발한 봄. 갑자기 그에게 불연 듯 찾아온 `암'. 그는 초등학생이었던 자식과 아내를 생각하니 착잡한 마음뿐이었다.

의사의 말은 그저 머릿속에서만 윙윙거릴 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그는 암에 걸렸다는 믿기 힘든,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을 외면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런 현실을 만든 장본인은 김 원장이었다. 운동과 담 쌓고 살면서 매일 같이 술을 마셨으니 육체가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아무리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어도 매일 혹사당하면 고장나 바로 질병으로 이어진다”며 “누구보다 이 과정을 잘 아는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내가 알면서도 무시하며 살아왔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나의 몸은 점점 약해져 갔고 체중은 105kg까지 불어났지만 건강하다고 나 자신을 속이며 검진조차 받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는 설명이다. 암은 누구의 탓도 아닌 나 스스로의 탓으로 생긴 병이라고.

그는 당시 주치의가 “이런일로 만나게 돼서 유감”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는 의사가 `자신의 몸에 왜 이렇게 무심했습니까' 라는 뜻에서 하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고 했다. 그래도 담당의사는 수술이 가능하다며 빠른 시일 내 수술을 진행할 것을 권유했다. 김 원장은 `암'이라는 단어에 충격이 컸는지 수술로 완치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기 어려웠다고 한다.

 

일주일째 계속되던 설사…두 아이들 재촉에 검사받으니 직장암
항암치료 거부 2년간 산골 생활하며 건강회복 10년간 재발안해
건강 음식에 관심갖게 돼 `발효식품공학 석사과정' 공부도 시작

 

■산골생활…내 몸이 살아나다

수술은 예상보다 좋았다. 이제 김 원장과 암과의 싸움이 앞으로 남아있었다. 암은 언제 재발해 다시 목숨을 위협할지 모르는 숨겨진 칼날과 같기 때문이다.

김 원장은 항암치료에 대한 불신으로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도시를 떠나 산골생활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가족은 남긴 채. 이는 낯선 곳의 생활이 스트레스로 이어져 오히려 병을 얻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김 원장은 친한 후배에게 병원을 맡긴 채 좋은 공기와 물, 스트레스가 없는 지리산 자락의 섬진강변으로 내려가 생활하기 시작했다. 암 수술 후 3개월이 지난 시점이다.

김 원장은 아침에 일어나 오염되지 않은 공기를 마시며 단전호흡과 태극권으로 몸을 풀고, 집 앞 덧밭을 일구워 키운 채소와 산에서 캐온 나물들로 밥을 지어먹었다.

그리고 심심하면 근처 산에 올랐다. 계절의 변화도 느끼고 불을 때기 위해 나무를 하러가기도 했다. 김 원장의 체중은 자연스럽게 105kg에서 75∼8kg으로 정상몸이 되어 있었다.

김 원장은 “지리산에서 1년 6개월, 강원도 태계산에서 6개월 자연을 벗 삼아 2년여 생활을 했다”며 “이 시간 행복했다. 도시로 돌아와 10년 지금까지 암은 재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혼자 노래방가는 의사…발효식품이 `건강 회복' 한몫

김 원장은 암 수술 이후 건강을 회복하는데 산골생활도 중요했지만 `노래방'과 `발효식품'도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 달에 한 번씩 혼자 노래방을 찾는다고 한다. 한시간 동안 신나게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부르면 그 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모두 풀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 원장은 “다시 바쁜 일상으로 복귀하다 보니 화나는 일 짜증나는 일이 생긴다”며 “이런 스트레스를 담고 있으면 암이 재발할 거 같아 일명 `소리치료'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와 함께 식습관에도 많은 변화를 시켰다. 김 원장은 “암 투병이후 고기보다 채소, 과일, 두부와 콩, 청국장 등을 위주로 먹고 있으며 술은 예전처럼은 폭주는 아니지만 발효주를 한두잔 정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발효주가 천연재료를 숙성시켜 만든 술로 반주로 곁들이면 해를 끼치지 않을 뿐 아니라 발효 과정에서 생긴 성분으로 몸에 이롭다고.

김 원장은 “발효식품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싶어 `발효식품공학' 석사를 다니고 있다”며 “암을 겪은 후 우리가 먹는 음식의 중요성을 실감했고 음식을 통해 건강을 도모하는 방법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죽음을 받아들이면 암도 무섭지 않다”고 말한다. 즉, 스스로 즐겁게 이겨내려는 노력만 갖춘다면 무엇이든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김 원장은 “육체는 건강의 위협을 알려줬고 인생은 가족의 소중함과 살아 있다는 행복을 놓치지 말라고 경종을 보낸 듯 하다”며 “다시는 육체와 인생이 주는 경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홍미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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