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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의학교육을 확립한 - 이갑수
여성 의학교육을 확립한 - 이갑수
  • 의사신문
  • 승인 2011.05.19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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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어촌 위생 개선 활동·의학교육 발전에 공헌

이갑수(李甲秀)
미수 이갑수(李甲秀)는 1899년 황해도 김천군에서 태어나 서울로 와서 매동보통학교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를 거쳐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현 서울의대)에 입학, 1920년 졸업하였다. 졸업후 경의전부속병원 내과에서 의사로서의 첫 수련에 나섰다.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1921년 이승경의 지원을 받아 독일 유학을 떠났다. 1924년 베르린대학에서 `탄수화물 흡수력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귀국길에 프라이부르그대학 내과에서 다시 1년간 더 수련받고, 미국을 거쳐 1926년에 귀국하였다. 그의 학구열은 멈추지 않아 1933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1939년 교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러한 역정에서 이갑수가 만난 인사들은 경의전 동창생으로 이정재, 장희태, 장용태, 박주병, 곽한용, 독일유학생으로는 함께 유학을 떠난 최두선, 박주병, 의학계통으로는 박주병을 포함하여 이성용, 정석태, 박장용, 의료계통 이외로는 최두선을 포함하여 김준연, 박승철, 이운용(그의 중형 이관용이 파리평화회담 때 상해임시정부로부터 가져온 진정서 제출에 많은 공을 세움), 황유일, `프라이부르그'대학에서는 먼저 가 있던 유일준(미생물), 이석신(생화학), 귀국길 미국에서는 이승만, 임병직을 만나 민족자결주의를 포함한 세계정세에 대한 식견을 넓혔다.

독일에서 돌아온 이갑수는 서울 수송동에 자신의 진료소를 개설하였다. 그리고 일본유학에서 돌아온 다음에는 조선총독부의 보건관련 방계단체를 만들어 벽지 무의촌지역 순회진료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농어촌위생개선에 전념하였다.

이갑수는 평소 위생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이 무렵 `위생학'이란 책자를 만들어 배포하였다.

호남 거부 우석(友石) 김종익의 유언에 따라 1940년 오늘의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전신인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가 설립되자 내과 책임자로 들어가면서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김종익은 별세 직전 총액 280만원이라는 엄청난 재산을 내놓고 여자의전 설립을 포함 우리나라 의료발전에 써달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초대 교장은 일본인인 사토(佐藤剛臟)가 맡았다.

광복과 더불어 이갑수는 그간 쌓은 인맥을 되살려 돈암장으로 이승만을 찾고, 한편으로는 임정요인인 김규식, 김구, 윤기섭, 조완구, 신익희 등과도 만난다. 뿐만 아니라 서재필, 안재홍과도 친분을 쌓았다.

그러한 활동에 힘입어 이갑수는 경의전 병원장을 맡았으며 1950년 1월에는 보건부 차관으로 발탁되었는데 1·4후퇴 직전 그만 두었다. 피난지 부산에서는 제약회사를 경영했으며, 경성여자의전 측으로부터 학교재건에 힘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다시 의학교육계로 뛰어들었다. 학장을 맡은 이갑수는 이주걸(李柱傑)의 협조로 학교의 재정난과 재단·교수회·학생간의 불화를 조정함으로써 학교기반을 튼튼히 다졌다.

여의전은 그 후 남녀 공학인 수도의대·우석대학교 의과대학으로의 개명을 거쳐 오늘의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수도의대 학장시절, 그는 세계의학교육자대회에 참석하는 등 서양의학 도입에 남다른 정열을 보였다. 이갑수는 1961년 수도의대학장을 사임했으나 우석대학 학교법인 이사(1962∼1970)를 역임하며 학교발전을 도왔다.

그는 대한적십자사 중앙위원·집행위원·심사위원(1947∼1959),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 후원이사(1948∼1963), 대한연식야구협회장(1954∼1965), 서울컨추리클럽 회원, 로타리클럽 회원, 한독협회 이사, 한미협회 회원, 대한유년단본부 고문 등을 역임했다.

기독교 교인으로 천성이 강직했고 근검절약을 신조로 삼았다. 가정생활에서나 직장생활에서 자신의 성격 그대로 일생을 살았다. 일제 여의전 재직 시절, 일본의 창씨개명에 강력히 반대했던 것도, 병원 안에서의 한글 사용 주장도, 그의 그러한 강직한 성격의 한 단면. 그래서 친구들이 그에게 붙인 별명이 `철학박사'였다. 이갑수는 1973년 작고하였다.

집필 : 권오주(권오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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