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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민간병원 설립자, 외과의사 - 백인제
최초 민간병원 설립자, 외과의사 - 백인제
  • 의사신문
  • 승인 2011.05.19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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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의사회 초대회장 역임·백병원 기틀 마련

백인제(白麟濟)
백인제(白麟濟)는 1899년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아버지 백희행(白禧行)과 어머니 청주 한씨 사이의 4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정주 오산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경성의전 시절 삼일운동에 가담하여 퇴학당하고 6개월간 형을 살게 되었다. 다음해 복학하여 1년 늦게 수석으로 졸업하였으나 삼일운동과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바로 의사면허를 받지 못했고 총독부병원에서 2년간 무보수로 일한 뒤에 의사면허를 받았다.

1923년부터 총독부의원 의원(醫員)으로 일했으며 1927년 경성의학전문학교의 외과 강사로 발탁되었고 후일 주임교수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1928년 백인제는 `실험적 구루병의 연구'로 도쿄대학 의학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백인제는 외과의사로서 충수염 및 충수염성 복막염을 1천예 이상 수술하였다고 전해지며 1937년에는 유착성 장폐색에 대해 폐색부 상부 장관을 복벽에 유착시켜 장루(腸瘻)를 형성하는 방식의 장감압술(腸減壓術)을 세계 최초로 실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바세도우씨병의 절제술을 할 때 루골액으로 기능을 저하시키고 영양물을 많이 섭취케 하여 수술 성공률을 높였으며 장폐색증 보조요법으로 수액을 정주하는 것을 강조하였으며 수혈요법을 강조하였다.

백인제는 두 번에 걸쳐 의학연수를 하게 되는데 1차는 1930년 약 3개월 동안 독일 등 유럽을 방문하였고 1936년 2차 연수에는 약 1년 3개월간 당시 최고라고 하는 독일의 베를린대학 외과에서 최신 의학을 접할 수 있었다.

귀국하는 길에 미국을 방문하여 미네소타주 로체스타에 있는 메이요 클리닉을 시찰했으며, 미국 동부 도시들을 시찰한 후 웨스트버지니아주 찰스턴시립병원의 임상병리 주임으로 있던 서재필을 만나기도 했다.

2차 연수를 통해 그는 배와 기차로 세계 일주하였으며, 의학은 물론이고 세계에 대한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 특히 메이요 클리닉은 외과병원으로 시작하여 종합병원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날리고 있었는데 이후 그가 백외과의원을 설립할 때 모델이 되었다.

1932년 백인제는 스승 우에무라(植村)로부터 우에무라외과의원을 넘겨 받았으나, 후배에게 맡겨 위탁경영을 하다가 1942년 경성의전 외과교수직을 사임하고 백외과의원을 개원하였다.

백외과의원은 원장 백인제와 더불어 김희규, 주영재, 윤덕선 등이 진료를 했으며 당대 최고의 외과병원으로 이름을 날렸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조선의사회가 결성되자 백인제는 학술부장으로 선임되었고, 서울시의사회 초대회장으로 선임되었고 1947년에는 조선외과학회 초대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41년부터 46년까지 짧은 기간 동안에 백인제는 상당한 재산을 모을 수 있었는데, 자신이 사는 집을 빼고 나머지 전재산을 재단법인 백병원에 기증하여 사회에 환원하는 선각자적인 모습을 보였다. 백인제는 5·10 선거에 무소속으로 서울 중구 선거구에서 출마하였다가 낙선하였다.

백인제는 인민군 점령 20여일만인 1950년 7월 동생 백붕제와 함께 납북되었다. 이후 북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확실한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납북된 후 그가 설립한 백외과의원은 그의 뜻을 이은 조카 백낙환 등의 노력으로 그의 이름을 딴 종합대학교 인제대학교와 서울백병원, 부산백병원, 상계백병원, 일산백병원, 동래백병원으로 발전 계승되었다.

집필 : 서홍관(국립암센터 암예방검진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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