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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황제의 어의, 독립투사 - 이태준
몽골 황제의 어의, 독립투사 - 이태준
  • 의사신문
  • 승인 2011.04.20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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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 근대 의술 전파 및 항일 독립 운동 헌신

경상남도 함안에서 1883년에 태어난 세브란스 의학교 제2회 졸업생 이태준(李泰俊)은 일국의 어의가 되었을 뿐 아니라 나라가 어려울 때에 항일 독립운동가로서 큰 족적을 남긴 의료계의 선구자이다.

1911년 세브란스의학교를 졸업한 이태준은 안창호의 권유에 따라 신민회의 자매단체로서 최남선이 이끌던 청년학우회에 가입하였으며 일본경찰의 체포에 직면하자 김필순을 따라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국외 탈출 후 이태준은 중국 남경에서 기독회의원 의사로 취직해 있으면서 1912년 중반에는 중국혁명세력의 학생군에 가담하였던 한인유학생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독립운동계획을 모색하였다.

1914년경 몽골지방에서 비밀군관학교의 설립과 항일혁명단체를 조직할 계획을 가지고 있던 김규식의 권유에 따라 이태준은 몽골의 교륜(현재의 울란바타르)으로 가게 되었으나 자금조달의 실패로 이 계획은 무산되고, 이태준은 동의의국이라는 병원을 개업하였으며, 1918년에는 김규식의 사촌동생인 김은식과 결혼하였다.

라마교의 영향이 커서 병에 걸리면 기도나 드리고 주문이나 외우고 미신적인 치료법만을 알고 있던 몽골인들에게 근대적인 의술을 익힌 이태준의 성과는 매우 높았다. 이태준은 몽골왕궁에 출입하게 되었고 몽골왕의 어의가 되는 등 몽골왕족들의 두터운 신임을 확보하게 되었다.

특히 몽골인들의 70∼80%가 감염되어 있었던 성병퇴치에 지대한 공헌을 함으로서 몽골민중으로부터 `신인(神人)'으로 대접받았으며 울란바타르일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고 한다.

이러한 신뢰를 발판으로 이태준은 각지의 애국지사들과 긴밀히 연락하면서 항일운동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 특히 중국의 장가구와 울란바타르 사이를 오가는 애국지사들에게 갖가지 편의를 제공했다. 이태준의 활동 가운데서 주목할 것은 당시 모스크바의 레닌정부가 상해임시정부에 제공하는 코민테른 자금 40만루불을 모스크바로부터 울란바타르, 장가구, 북경을 거처 상해까지 운반하는 일의 책임자로서 그 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점이다.

이태준은 의열단에 가입하는 등 항일운동을 계속하다가 1921년 러시아 백위파의 스테른베르그부대가 울란바타르를 점령하고 약탈할 때 그의 병원도 약탈을 당했고 그는 백위파군대에 체포되었다.

이 군대에 참모로 있던 일본인 장교들은 이태준을 `불량선인'으로 지목하고 있던 터라 이들의 주장에 따라 같은 해 그는 처형되었는데 그의 나이 38세였다. 당시 울란바타르에 주둔하고 있던 중국군 사령관의 주치의이기도 했던 이태준은 중국부대가 철수할 때 동행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응하지 않고 있다가 참변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태준은 사후 몽골인들이 성산이라고 부르는 남산구릉 한복판에 매장되었는데 연세의료원은 2001년 그의 묘를 발굴하여 몽골정부로부터 2000여평의 토지를 기증받아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연세의대동창회, 중앙아시아 선교후원회, 울란바타르 대학의 참여와 일반 모금을 통하여 그의 묘소자리에 이태준기념공원을 준공하여 관리하고 있다.

1930년 가을 시베리아의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되는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울란바타르에 체류중이던 여운형은 이태준의 묘를 찾아 보고 1936년 [중앙]에 기고한 그의 여행기에서 “이 땅에 있는 오직 하나의 이 조선사람의 무덤은 이 땅의 민중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한 조선 청년의 거룩한 헌신과 희생의 기념비”라며 이태준을 애도했다.

집필 : 황의호(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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