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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학협회의 초석, 서울의대 초대학장 - 심호섭
대한의학협회의 초석, 서울의대 초대학장 - 심호섭
  • 의사신문
  • 승인 2011.04.20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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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학 여명기에 의대 설립·의사단체 기틀 마련

심호섭(松岩 沈浩燮)
송암 심호섭(松岩 沈浩燮)은 한국의학 여명기에 내과학 발전과 후학육성에 이바지한 교육자이며, 광복 후 대한의학협회(현 대한의사협회)를 창립하여 초대회장으로서 의사단체의 기틀을 확립한 개척자이다.

심호섭은 1890년 서울에서 미곡상을 하는 심상기와 김씨부인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호동소학교(효제초등학교 전신)와 광성실업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1908년)한 심호섭은 가업을 이어가기를 희망한 부친의 뜻에 따라 1년 동안 집안 일을 도왔으나 적성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당시 우리나라에 도입되기 시작한 서양의학에 대한 호기심과 공부를 더 하고 싶은 마음에 그 이듬해(1909년) 대한의원부속의학교(경성의학전문학교 전신)에 입학하였다.

심호섭의 의사생활은 1913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제생원의원을 겸하면서 총독부병원의 의원으로 제8호 정신병실을 담당하면서 시작되었다. 경성의학전문학교 내과 에 소속된 심호섭은 주로 행려환자, 정신병환자 등을 열심히 치료하면서 내과학에 정통하는 한편 각종 검사를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후 심호섭은 1917년에 세브란스병원 내과로 자리를 옮겨 20여년동안 내과학과 정신과학 교수로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일본식 의학을 배운 심호섭은 처음에는 미국식 의학을 직접 시료하는 세브란스병원에서의 생활에 적응하는데 어려움도 있었으나 근면, 진실한 본래의 성격 때문에 묵묵히 환자진료에 임하면서 적응하게 됐고 동료들의 신망을 얻기까지 했다.

세브란스병원 재직기간은 의사 심호섭의 일생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세브란스의 사랑을 바탕으로 한 환자치료방식은 임상의학자로 또 개업의사로 활동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당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에비슨교장의 합리적인 사고와 행위에 깊은 감명을 받은 심호섭은 에비슨을 존경하게 되었는데 에비슨 또한 심호섭에게 후원을 아끼지 않고 많은 배려를 하였다.

심호섭은 1922년 도쿄대학 의학부에 유학하여, `아드레나린, 아트로핀, 필로카르핀의 당배출에 관한 연구'를 하였고 약제치료보다는 안정, 생리적인 조절을 강조하고 병태생리를 정상화시키는 방향의 치료방법에 영향을 받고 호흡기계통, 소화기계통의 질환에 대해 많은 경험과 지식을 얻었다고 한다.

1926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로 복귀한 심호섭은 내과학과 정신과학을 강의했는데 특히 소화기계통의 강의는 많은 인기가 있었다. 경의선복선공사로 재귀열 환자가 발생했을 때 환자의 혈액중에 재귀열 스피로헤타 약40종을 발견, 확인하기도 했다.

1934년 에비슨이 정년으로 교장직을 퇴임하자 심호섭은 1935년 전임교수직을 사임, 관철동에 개업했는데 사임 후에도 1940년 까지 1주일에 2시간씩 강의를 맡아 후진을 양성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장에 심호섭이 추대됨으로써 병원을 폐업하고 다시 교직으로 돌아왔는데 이듬해인 1946년 국대안이 통과되면서 경성대학과 경성의학전문학교가 통합,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발족하면서 초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장에 선임되었다.

한편 광복과 함께 의학회 재건에도 앞장서 1946년에 대한내과학회를 창립, 초대회장을 맡았으며, 이에 앞서 1945년에는 신경정신의학회를 창립, 초대회장에 선출되기도 하는 등 의학계의 선구자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1947년 9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장직을 사임, 다시 관철동에 개업했다.

한국의학 여명기에 많은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썼을 뿐 아니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설립의 기틀을 다지는 등 의학교육자로서 크게 공헌하는 한편 내과학발전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 심호섭은 대한의학협회의 개척자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34년 일본강점시대 일본인 의사들을 주축으로 구성된 경성의사회에 대항하여 한성의사회를 창립, 초대회장을 맡은 바 있는 심호섭은 1947년 대한의학협회가 창립되자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이후 6대에 걸쳐(4, 5, 6, 8, 9, 10대) 회장직을 수행하면서 격변기 시대 의료제도 개선과 의사단체 발전에 기여했다.

6·25이후에는 미국 뉴욕에서 한미재단 이사장으로 있는 러스크의 도움으로 미국의학협회 회원들이 보내준 20만달러 상당의 양복지를 의사회원들에게 시가의 절반이하 가격으로 배분하여 그 돈을 기금으로 의친왕궁을 매입, 최초로 자체 회관을 마련하기도 했다.

1973년 83세를 일기로 별세했는데 당시 대한의학협회는 처음으로 의학협회장으로 장례를 치루었다.

집필 : 백용기(전 대한의사협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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