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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相仁 선생님 靈前에 바칩니다.
金相仁 선생님 靈前에 바칩니다.
  • 의사신문
  • 승인 2011.04.07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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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일전 이달 모임에 나옵시사고 전화를 드렸었는데, 이 어인 청천벽력 같은 訃音이란 말입니까.

진작에 선생님께서 편찮으신 줄은 알고 있었지만 선생님 특유의 강인한 정신력과 인내심, 그리고 선생님께서 애써 키워놓으신 현대의학으로 병마를 훌훌 물리치시고 건강을 회복하실 것으로 확신하고 있던 터였습니다.

더구나 2003년 선생님을 모시고 북한을 방문했을 때, 선생님께서 백두산 천지의 가파른 상상봉을 거침없이 오르시는 모습을 밑에서 바라보면서 내심 선생님께서는 저보다 휠씬 더 장수하실 것으로 믿었었습니다.

佛家에서는 형제로 만나는 것은 9000劫에 한번, 부모나 스승으로 만나는 것은 萬劫에 한번의 확률이라 일컫습니다.

같은 시대, 같은 나라, 같은 醫大동창이나 師弟之間이 되는 것도 위에 못지않은 인연일터인데 선생님께서는 어찌하여 이같이 소중한 사제지간, 선후배의 인연을 칼같이 끊으시고 홀연히 저희 곁을 떠나셨습니까.

선생님을 보다 가까이에서 뵙게 된 것은 1972년 제가 병원 임상검사과의 기생충검사실장에 임명되었을 때부터입니다. 그때 과장님이시던 선생님께서 임상병리학을 독립 발전시키고자 고군분투하시던 모습을 지금도 잊을 길이 없습니다. 결국 外柔內剛의 底力으로 주위의 권위주의와 독선을 끝내 이겨내시고 1984년에 임상병리학교실(현 진단검사의학교실)을 창설하셨습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 선생님은 성실하시고 열성적이시고 정의로운 선비셨으며 어쩌면 農夫와도 같은 소탈함과 겸손 그리고 대단한 인내심과 친화력을 지니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방과 후의 뒤풀이 모임에서는 흥이 나시면 시도 읊으시고 노래도 부르시는 人間味넘치는 분이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후학들이 선생님을 흠모하고 따랐기에 대한혈액학회 회장, 대한임상병리학회 회장을 비롯한 수많은 학술단체의 수장에 추대되셨으며 대한적십자사 부총재까지 역임하셨습니다. 凡人같았으면 이런 자리를 누리기만 하였을 것이지만, 선생님께서는 탁월하신 학문적 경륜과 더불어 고매한 인품으로 그 의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셨기에 지도자로서의 귀감이 되셨습니다.

여기서 특기하려는 것은 선생님께서는 서울의대 개교 이래 최초로 시행된 학장직선제에 의해 서울의대 제20대 학장으로 추대된 사실입니다. 교수들의 직접투표에서 최다 득표로 당선되셨음에도 너무 겸손해 하셨기에 당시 부학장이던 제가 `過恭은 非禮'라고 당돌하게 말씀드렸던 일을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렇지만 학장에 취임하신 후에는 2년간의 짧은 임기 중에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의대 소속이던 간호학과를 간호대학으로 독립, 승격시키시고 의대 발전기금조성의원회 발족, 도서관에 Medlars Center 개소, 또 `학부모의 날'과 `동창의 날'제정 등이 그것인데, 특히 `학부모의 날'과 `동창의 날'제정은 우리 의대가 학내 교수와 학생위주의 폐쇄적 운영을 해오던 관행을 타파하고 개방적 대학을 지향한다는 혁신적인 선언의 뜻이 담긴 것으로 해석됩니다.

지금도 서울의대 기초연구동의 中庭에는 `含春동산'이란 글이 새겨진 자그마한 비석이 남아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동창 선후배들의 뜻을 모아 꽃과 나무를 심고 잔디밭을 일구어 대학내의 명소를 만드신 기념비입니다. 저는 그곳을 지날 때 마다 학장이 농부같이 손수 김을 매고 계신 선생님의 幻像을 뵙게 됩니다.

선생님께서는 2001년부터 한국건강관리협회 회장직을 맡으셨기에 저는 부회장으로 다시 선생님을 보좌한 바 있습니다. 2003년 선생님을 모시고 평양에 갔을 때 선생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병원 검사실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시고 살펴보셨습니다. 그리고 후에 그곳에 필요한 검사장비를 지원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나중에 깨달은 일이지만, 이는 단순히 기계나 시약을 보내는 차원이 아니고 낙후된 북한의 의료를 증거중심의 국제의학수준으로 끌어올리려면 그리고 통일 후 남북한의 의료균형과 소통을 기하자면 진단검사의학의 발전이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는 선생님의 원대한 구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추후 남북관계가 개선된다면 건강검진연구소 설립을 비롯하여 북한소재 여러 병원 검사실의 장비 및 인력지원과 교육이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제가 2006년에 한국건강관리협회의 회장직을 승계하면서 선생님께서 다져놓으신 인화와 인륜을 중히 여기는 풍토, 선생님의 철학인 利他主義와 박애정신, 민주주의와 인도주의를 실천으로 옮기려고 노심초사하였던 것도 솔직한 사실입니다.

하여간 소탈하신 선생님께서는 그 어떤 修辭보다도 그냥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라실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 세상에 좋은 사람이 많이 살아야 樂土가 이룩될 터인데 좋은 사람의 대표이신 선생님께서 총총히 불귀의 길을 떠나시니 이 紅塵에 남겨진 저희 후학들은 난감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會者定離 요 生者必滅'이라는 옛말이 진실일진데 저희 후학들은 애통하기 이를 데 없으나 선생님의 서거를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선생님의 遺志를 받들어 선생님을 닮은 `좋은 사람'으로 살아갈 각오입니다.

부디 天國에서도 선생님께서 그처럼 사랑하시던 사모님과 자랑스런 자손들, 그리고 선생님을 따르던 후학과 제자들을 굽어 살피시면서 선생님 안계신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삼가 영원히 잊지못할 저희들의 스승 金相仁교수님의 명복을 祈願합니다.

2011년 3월 26일
李純炯 哭拜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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