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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이비인후과 의사 - 홍석후
첫 이비인후과 의사 - 홍석후
  • 의사신문
  • 승인 2011.03.30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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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비인후과 발전 초석 마련·후학양성에 헌신

홍석후(洪錫厚)
홍석후(洪錫厚)는 본관이 남양이며 홍준과 김사배의 장남으로 1883년에 태어났다. 홍석후는 배재학당에서 신흥우, 이승만 등과 함께 공부를 한 후 1903년 관립의학교에 입학하여 1906년 장기무, 윤종익, 홍종은 등과 함께 3회로 졸업하였다. 그는 한때 종로에서 자혜의원을 개업하여 성업 중이었으나 본인이 환자를 보기에는 경험이 너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에비슨에게 부탁하여 1906년 2월 제중원의학교에 편입하였다.

제중원의학교를 졸업한 후 홍석후는 의술개업인허장 3번을 받았으며 학교에 남아 안과와 이비인후과를 택했다. 그의 동생 영후(홍난파)도 세브란스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음악가의 길을 택했다. 홍석후는 1912년 부임한 안이비인후과 전문의인 보우만의 조수로 활동했는데 보우만이 부인의 병때문에 미국으로 돌아가자 홍석후는 이 분야를 책임지게 되었다.

홍석후는 술을 무척 좋아 했는데 어느 날 어느 회합 끝에 기독교인으로서 음주를 문제 삼는 목사에게 에비슨은 “그 사람이 우리 병원에서 환자치료도 잘하고 학생들을 잘 가르치고 있는데 그들의 사생활에는 교장도 관계할 수 없습니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에비슨은 홍석후를 미국으로 보내어 연수시키기로 결정하고 1921년 미국으로 보냈다. 홍석후는 캔사스시 치과대학의 해부학교수였던 마이어스 밑에서 두경부 해부학 과정을 이수하고 뉴욕의과대학에서 전공연구를 계속했는데 그는 자신의 전공분야에서 우수한 학생이며 솜씨 좋은 의사라는 평을 받았다. 2년간의 연수를 마친 홍석후는 귀임하여 이비인후과를 담당하였다.

특히 유족들에 의해 모교 이비인후과에 기증된 그의 손때 묻은 두개골 표본은 그가 도미 유학시절 손수 만들어 가면서 공부하던 것으로서 우리나라 의학 발전사에 깊은 뜻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홍석후는 1회 졸업생 중 가장 오래 학교에 남아 후학양성을 위해 매진하였다. 1929년에는 모교의 교두로 취임하였으며 1931년에는 다년간 중임했던 안과 및 이비인후과 과장 겸 교두의 직을 사임하고 학교강의만 담당하였으며 병원을 개설하여 야간진료를 하였다.

1931년에는 학교에서 완전히 사임하고 종로에 개원한 진료소에서는 안과와 이비인후과 환자만을 진료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전문분야 개업의 효시라 할 수 있다.

그는 1940년에 사망하였는데 임종 전에 직접 지은 한시를 제자 정기섭에게 보이면서 마음의 회포를 털어 놓았다고 한다. 그 한시의 내용은 자기가 부친보다 먼저 세상을 떠남을 못내 불효로 생각하면서 한탄하는 것이었다.

이용설에 의하면 홍석후는 인간적으로 매우 훌륭한 사람으로 일반사람으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홍석후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큰 아들 재유는 1930년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전쟁 때 군의관으로 활동하다가 제대 후 제천에서 개업하였으며 둘째아들 은유도 1931년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집필 : 황의호(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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