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8 22:50 (목)
개업면허 시험합격 1호 - 고명우
개업면허 시험합격 1호 - 고명우
  • 의사신문
  • 승인 2011.03.24 09: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러들로의 수제자 한국 외과학 발전 초석 마련

고명우(高明宇)
세브란스의학교 제3회 졸업생 고명우(高明宇)는 러들로가 처음으로 외과를 가르친 학년의 학생이다. 그는 1883년 부친 고학윤과 모친 안이아 사이에서 장남으로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한학에 조예가 깊은 선비로서 새로운 개화의 물결이 들어올 때 미국인 선교사에게 우리말을 가르치게 되어 상경하였던 중 1893년 내한한 선교의사 어빈 및 에비슨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어린 시절 한문을 공부한 고명우는 부친을 따라 부산으로 내려갔고 장로회 학교에서 공부를 마쳤다. 1896년부터 1909년까지 부산의 선교병원에서 어빈의 조수로 일하였으며 어빈이 안식년으로 귀국했던 1902년에는 1년 동안 서울의 영국 및 외국 성서협회(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에서 일하였다.

1906년 그는 세브란스 제1회 졸업생 김필순의 조카인 정신여학교 1회 졸업생 김세라와 결혼하였다. 1909년에는 1년 동안 일본 동경에서 일본어 공부를 하였고 1910년 관립의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빼앗기자 자퇴하고 1910년 세브란스에 편입하여 1913년에 세브란스의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직후 1년동안 세브란스병원에서 인턴과정을 수료하면서 러들로로부터 외과를 수련받았고 1913년 8월에는 세브란스 졸업생으로서는 한국에서 개업할수 있는 시험에 처음으로 합격하였다.

인턴을 끝낸 고명우는 1914년부터 6년간 황해도 수안의 금광의무실(Sun gold mines of Collbran and Bostwick)의 책임자로 근무하면서 광부 가족을 위하여 학교와 작은 교회를 설립하였다. 고명우는 1920년에 모교 세브란스로 돌아와 러들로의 제1조수로 근무했으며 이 해에 강사로 승진되었다. 1921∼1922년에 러들로 교수가 안식년을 맞이하여 귀국했을 때는 외과학교실의 책임자로서 훌륭하게 업무를 수행함으로서 크게 신뢰를 얻었다. 특히 그는 점잖은 성품, 인내심, 가난한 환자에 대한 배려 등 여러모로 모범적인 활동을 펼쳤으며 출석하던 남대문교회에서 장로가 되었다.

그는 1926년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뉴욕의과대학(New York Postgraduate Medical School)에서 6개월동안 수련을 받은 후 롱아일랜드병원 의과대학(Long Island Hospital Medical College)에 입학하여 1928년에 졸업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일본의 규정에 따라 그를 정교수로 임용하기 위해서였다. 1928년에 귀국한 고명우는 세브란스 외과에 근무하여 외과학 조교수가 되었으며 1929년에는 일본 문부성으로부터 교수자격을 인정 받았다.

1933년 7월 고명우는 휴가 중임에도 4명의 4학년 학생, 의사 1명, 간호사 2명으로 진료팀을 만들어 동아일보사와 공동으로 당시 홍수로 고생하는 남부지방 수재민 진료에 나섰다. 총 10일간 진료에 300여명 환자를 진료했다고 한다.

1937년 러들로는 미국 뉴욕의 한 재단관계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나는 미국에 공부하러 온 많은 한국인을 큰 관심을 갖고 접촉하면서 살펴보았는데 고명우보다 더 인상적인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그의 고상한 봉사는 분명 누구나 원하는 바로 그것이다.”

1938년 러들로가 사임하자 고명우도 학교를 사임하고 원효로에서 10여년 동안 개업하다가 한국전쟁 때 큰 딸 봉경과 함께 납북되었다. 고명우가 학교를 사직할 때 셋째딸 난경은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장남 원영은 1939년에 세브란스에 입학하여 1943년에 졸업하였다.

집필 : 황의호(연세대 명예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