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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사 1호 - 박에스더
여의사 1호 - 박에스더
  • 의사신문
  • 승인 2011.03.16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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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의료교육 헌신 및 여성의 사회진출 제시

박에스더(Esther Kim Park)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Esther Kim Park)는 1877년에 태어나 1910년 34년의 짧은 생을 마감하기까지 한국 여성들을 위해 불꽃같이 살다 간 참된 의사였다.

박에스더는 본명이 김점동(金點童)으로 아버지 김홍택과 어머니 연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세례명이 김에스더였고 훗날 남편의 성을 따라 박에스더라 불렸다.

박에스더는 선교사인 아펜젤러 집에서 일하며 일찍이 서양문물을 접하던 아버지 덕분에 당시 여자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으려는 풍습에도 불구하고, 1886년 한국근대 최초 여학교인 이화학당에 입학하게 되었다.

유달리 총명하고 영리했던 박에스더는 학업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였으며, 특히 영어에 능통하여 선교사들의 통역을 맡기도 하였다.

1890년 보구여관(保救女館)의 의사이자 이화학당의 교사로 취임한 로제타 셔우드 홀의 통역을 맡게 된 박에스더는 홀밑에서 의료보조 훈련반으로 여러 의학강의를 듣고 홀의 시술을 옆에서 지켜보며 자신도 의술을 배울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박에스더는 1894년 홀내외가 평양 유일의 병원인 광혜원으로 부임하자 홀을 동행하며 많은 환자들을 돌보며 헌신적인 의료활동을 펼쳤다. 그 즈음 홀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의 기회를 갖게 된 박에스더는 자신의 꿈과 이상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박유산이란 인물과 혼인하여 1895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이듬해인 1896년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의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아내의 의학도로서의 꿈을 위해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느라 뉴욕농장에서 일하던 박유산은 아내가 의사가 되기 직전에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그러나 어려운 역경을 딛고 1900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한국 최초의 여자의사 박에스더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해 한국으로 돌아온 박에스더는 종래의 봉건적인 관습과 미신으로 의학을 마치 귀신의 마술정도로 생각하는 국민들의 무지와 불신과 싸워야하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묵묵히 의술을 펼쳐나갔다.

특히 남녀유별의 유교적인 관습 속에 여성들이 남자의사를 찾아갈 수 없는 당시 상황에서 박에스더는 여성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물이었다.

보구여관에서 일을 시작한 첫해 10개월간 3천여 명의 환자를 돌보고, 황해도와 평안도 등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곳을 두루 찾아다니며 소중한 생명을 돌보았다.

박에스더는 이렇게 환자들을 돌보는 일 이외에도 국민들의 건강증진을 위해 위생교육을 실시하고 장애자를 교육하기 위해 세워진 맹아학교에서 교사로도 일했다.

또한 홀과 함께 한국 의료발전과 여성의료교육을 위하여 간호학교의 설립을 주도하였다. 의료활동과 계몽활동, 사회사업으로 국민들의 건강과 교육에 큰 업적을 남겼다.

또한 본인 스스로 여성의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여성들에게 사회진출의 새로운 영역을 제시하였다.

자신의 몸을 돌볼 겨를 없이 열정적인 삶을 살아온 박에스더는 남편을 앗아간 폐결핵으로 34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당시 여성으로서 쉽지 않은 의학의 길을 택하여 소외받던 한국 여성들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고 열정을 다했던 박에스더의 삶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여성들이 있지 않나 되새겨 본다.

집필 : 우복희(이화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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