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를 이은 의료봉사, 여의사 양성 - 로제타 홀
대를 이은 의료봉사, 여의사 양성 - 로제타 홀
  • 의사신문
  • 승인 2011.03.10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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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진료 발전 및 농아·맹인 교육 기틀 마련

로제타 홀(Rossetta Hall)
조선 말 암울한 시대, 생애를 이 나라 현대 여성의학 발전과 여의사 육성에 진력한 로제타 홀(Rossetta Sherwood Hall). 그는 미국에서 출생, 그러나 지금은 한강변 양화진(陽花津) 양지바른 곳에 묻혀 이 나라 의학발전을 지켜보고 있다.

그는 1865년 미국 뉴욕의 설리번 카운티 리버티에서 태어났다. 1년간 초등학교 교사생활을 거친 뒤 1886년 펜실바니아 여자의과대학에 입학, 1889년 졸업하였다. 의사가 된 로제타가 처음 진료에 나섰던 것은 뉴욕 빈민가. 그러나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에 자원함으로써 1890년 조선으로 오면서 우리나라와 인연을 맺었다.

로제타는 조선에 오자 메타 하워드(Meta Howard)가 맡았던 서울의 정동 이화학당 내 부인병원인 보구여관(保救女館)을 인계받아 그 책임자로 부임하였다. 당시 황무지나 다름없던 여성진료, 그리고 인재양성을 위한 의학교육 이를 위해 그는 보구여관의 책임을 맡자 우선 이화학당 학생 5명을 선발하여 조수로 쓰면서 의학을 가르쳤다.

로제타의 집념은 결실을 맺어 보구여관 조수 중 한 사람이던 김점동(金點童 Esther Kim Park)을 1896년 미국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보내 한국최초의 여의사로 키웠다.

로제타는 역시 선교사로 조선에 와 활동 중이던 미국의 의사 윌리암 홀(William Hall)과 1892년 결혼하였는데, 이때 올려진 예식이 한국에서는 처음인 서구식 결혼식으로 세인들의 관심을 모았다.

결혼을 계기로 조선의 `여성 진료', `여의사 양성'이란 그의 굳은 뜻이 더욱 구체화되어 갔다. 그는 1912년 이화여대 부속병원의 전신인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의 원장을 맡았다. 이 병원은 보구여관 동대문 치료소를 증축, 건립한 것. 뿐만 아니라 그는 1898년 평양에 광혜여원(廣惠女院)이란 치료소, 1900년에는 그곳에 맹인학교도 세웠다. 인천에는 지금의 인천기독병원 전신인 인천부인의원을 세웠다. 맹인학교 설립을 계기로 조선어 점자 교재가 개발되었고, 농아를 위한 특수교육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일본강점 하에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여자에게는 입학이 불허되던 총독부 병원부설 의학강습소(후에 경성의학전문학교가 된다)에 3명의 여학생을 입학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로제타의 오랜 바람은 김탁원(金鐸遠), 길정희(吉貞姬)부부와 함께 1928년 조선여자의학강습소를 세움으로써 비로소 열매를 맺으며, 그 절정을 이뤘다.

로제타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도 조선의 의료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남편 윌리엄 홀과 아들 셔우드 홀(Sherwood Hall)도 그의 뜻을 받들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남편 윌리엄 홀은 청·일 전쟁으로 늘어나는 부상자와 전염병 환자를 밤낮 없이 돌보다 과로로 쓰러져 안타깝게도 1894년 세상을 떠났다. 그와 윌리엄 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셔우드 홀은 평양의 외국인학교 1회생으로 다니다가 1911년 미국으로 건너가 고등학교, 대학을 졸업하고 부모와 같은 길을 걷기 위해 토론토 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전공은 결핵학. 그도 의사가 되어 역시 의사인 아내와 함께 1926년 조선으로 다시 돌아왔다.

셔우드 홀은 1940년 태평양전쟁 발발로 일본에 의하여 강제 추방되었다. 그때까지 해주(海州)에 병원과 결핵요양원을 세우는 한편, 우리나라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실 발매 등 공중보건·교육·시범농장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사업을 펼치며 어렵고 병든 사람들을 돕는 데 앞장섰다.

로제타는 우리의 해방을 보지 못한 채 1933년, 68세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조선을 떠나 고국인 미국으로 돌아갔다. 43년만의 일이다. 그리고 1943년부터는 뉴저지에 있는 한 양로원에서 지내다 1951년 85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미국에서도 그는 죽을 때까지 쪽진 머리에 한복을 즐겨 입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죽어서 평소 소원대로 바다를 건너와 그리운 조선 땅, 그리고 남편과 딸이 함께 묻힌 한강변 양지바른 양화진(陽花津)에 나란히 묻혔다.

집필 : 권오주(권오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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