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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의사 - 서재필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의사 - 서재필
  • 의사신문
  • 승인 2011.03.03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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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한국인 의사로 독립운동·근대화에 앞장

서재필(徐載弼)
서재필(徐載弼)은 호가 송재(松齋)이고 미국 이름이 필립 제이손(Phillip Jaisohn)이다. 서재필은 의사이면서 언론인이었으며, 또한 독립 운동가, 계몽 운동가, 민주주의 선구자, 정치가, 학자, 사업가, 국어학자였다. 세계의 어느 근대 역사에서 한 지도자가 이렇게 많은 분야에 공헌하고 업적을 남긴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서재필은 1864년에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났다. 서재필은 7세(1871) 때 상경하여 양모의 동생인 김성근의 집에서 한학을 배웠다. 18세(1882)에 별시문과에 합격하여 교서관부정자에 임명되었는데, 이 무렵에 김옥균, 서광범 등과 사귀게 되었다.

19세인 1883년에 파일 생도단의 대표 격으로 일본으로 건너 가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6개월간 일본어 교육을 받은 후 도야마육군학교(戶山陸軍學校)에 입학해 약 7개월간 군사 훈련을 받았다.

1884년에 귀국해서 고종의 승낙을 얻어 사관을 양성하는 조련국(操鍊局) 사관장(士官長)이 되었다. 20세인 1884년에 갑신정변에 적극 참여하였으나, 청(淸)을 업은 수구파의 반격으로 3일 천하로 끝났고, 서재필은 역적으로 몰리게 되었다.

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으나, 이듬해 다시 미국으로 망명해서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기독교 청년회에서 영어를 공부하여, 펜실바니아주 윌크스베어(Wilkes Barre)에 있는 해리 힐만 고등학교를 1889년에 졸업했다.

1889년 지금의 조지 워싱턴대학교의 전신으로 당시 워싱턴의 고등학교 졸업자 공무원들을 위해 설립한 야간대학인 코크란대학에 입학하여 1893년(29세)에 졸업하고 그해 의사면허를 취득했다. 이로서 서재필은 한국인으로서 첫 번째 서양의가 되었다. 1890년에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시민권을 얻었다. 1894년에 뮤리엘 암스트롱(Muriel Amstrong)과 결혼한 후 워싱턴에서 의원을 개업했으나 백인들의 유색인에 대한 편견으로 생활이 어려워 조선으로 돌아올 때는 주미 조선공사관에서 여비를 마련해 주었을 정도였다.

1894년 갑오개혁 후 갑신정변으로 서재필 등의 급진 개화파에게 내려진 역적의 죄명이 벗겨지자 1895년에 귀국하였고, 귀국 후 1896년에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러 있던 상황에서 러시아는 군사적·정치적 압력을 확대하면서 만주와 조선에 대한 침략정책을 폈는데, 이에 서재필은 러시아의 대한정책과 동아시아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의 기사를 쓰는 한편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러시아 고문단의 철수를 요구했다. 친러정권과의 대립으로 중추원 고문직에서 해고되자 1898년 미국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 후 서재필은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1924년까지 인쇄업과 각종 장부를 취급하면서 사무실용 가구를 파는 필립 제이손(Phillip Jaisohn) 상회를 경영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재미 한인들의 활동이 활발해 지자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연합대회를 개최하고 의장이 되었다. 이 대회의 결과에 따라 영문기관지로 한국평론(Korea Review)을 월간으로 발간하였다. 1920년과 1921년에는 3·1운동 기념식을 뉴욕에서 열기도 하였다. 이 후 양탄자 등을 취급하는 유일한(柳一韓)상회의 사장으로 사업에 종사했다.

1926년 펜실바니아 의과대학의 특별학생으로 등록했으며 그 후 여러 병원의 고용의사로 종사하는 한편 여러 편의 병리학 관련 논문을 썼다. 1936년부터는 필라델피아에서 개업의로 생활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징병검사관을 했다. 광복이 되자 미 군정청 장관 하지의 요청을 받아 1947년 미 군정청 최고정무관이 되어 귀국했다. 1948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1951년에 서거했다.

서재필은 우리나라에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소개하고 실천하며, 우리의 아름다운 문화와 민주주의의 사상이 잘 조화하고 결합되도록 신문의 사설을 통해서 계몽 운동을 지도하고, 사업을 통해 올린 거액의 수입 자금을 한국 독립운동에 모두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의사로서도 명성을 날렸으며, 특히 병리학계에서 공헌한 바가 크다.

그는 한국의 생활패턴을 바꾸는 것이 진보의 첩경이며, 모든 국민은 책임과 의무를 져야만 진정한 행복을 가져올 수 있다고 역설했다. 그는 또 국가가 국민을 위해서 해 주는 것보다는 국민이 국가를 위해서 공헌할 수 있는 많은 일을 제안했다.

서재필은 자기의 기회가 있을 때는 기회를 이용하지만, 기회가 닿지 아니할 때는 기회를 만들어서 사회에 봉사하던 위대한 의사였다.

집필 : 전세일(포천중문의대 대체의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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