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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에 처음 묻힌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 - 헤론
양화진에 처음 묻힌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 - 헤론
  • 의사신문
  • 승인 2011.02.28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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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어의로 활동한 제중원의 첫 번째 의사

헤론(John W. Heron)

헤론(John W. Heron, 惠論)은 1856년 영국 더비셔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때부터 의사가 되기를 원했고 14세가 되던 1870년 가족들과 함께 미국 테네시주의 녹스빌로 이주하였다.

헤론은 1883년 테네시의과대학을 졸업하였는데 졸업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해 교수회의에서 주는 금메달을 받기도 했다. 졸업 후 존스보로라는 도시에서 약 18개월 동안 개업을 하였다. 뉴욕의과대학에서 1년 동안 수련을 받으면서 어려운 경쟁시험을 통과해 Blackwell Island Hospital에 자리를 얻었고 모교로부터 교수직을 제의 받았지만 의료선교사가 되기 위해 이를 거절하였다.

1884년 4월 미국 북장로회에 의해 조선에 파견될 최초의 선교의사로 임명받고 이를 준비하고 있었다. 1885년 동업자의 딸인 깁슨(Gibson)과 결혼하고 같은 해 6월 20일에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헤론은 같이 근무하던 알렌과의 불화를 제외하고는 다른 선교사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았다. 그는 알렌보다 나이가 두 살 많았으며 모교의 교수직을 제의 받는 등 여러모로 알렌에 대해 우월감을 갖고 있었다. 환자진료에 있어서 그는 뛰어난 기술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고 특히, 백내장 수술은 환자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1886년에 헤론은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고 1888년에는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1887년 10월 알렌이 조선의 주미 초대전권대신으로 부임하는 박정양을 따라 참찬관 자격으로 미국으로 가게 되자 헤론이 제중원의 책임을 맡게 되었고 고종의 어의로 임명되었다. 또한 전임자 알렌이 하던대로 서울의 외국 거류민들과 선교사들도 돌보았다.

헤론은 기독교 서적의 번역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1887년에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여하였고 1889년 호주 장로회의 데이비스 목사가 내한해 선교사 공의회가 조직되자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문서사업기관의 설립을 계획하고 이를 구체화시켰는데 이것이 1890년 6월 창립된 대한성서교서회가 되었다.

이렇게 서울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헤론은 이질에 걸렸는데 처음에는 그리 심한 것 같지 않았으나 갑자가 나빠져 스크랜턴과 맥길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약 3주동안 심하게 앓다가 1890년에 남한산성의 외딴 집에서 운명하였다.

조선정부는 조약에 따라 그의 묘소로 서울 중심가에서 약 8km 떨어진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절두산 절벽 위의 넓은 장소를 지정해 주었는데 현재 마포구 합정동의 양화진 외국인 묘지이다.

헤론은 제중원에 근무한 첫번째 의사이자, 양화진묘지에 안장된 첫번째가 되었다.

집필 : 황의호(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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