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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제23번 F단조 작품번호 57〈열정〉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제23번 F단조 작품번호 57〈열정〉
  • 의사신문
  • 승인 2011.02.24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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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카디아'를 향한 격정과 평화

베토벤의 중기작품에서 가장 큰 걸작의 하나인 이 곡의 완성 시기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각 악장의 초입부분은 오페라 〈피델리오〉의 스케치북 가운데에서 이 곡의 스케치부분이 발견되면서 이 곡이 1804년 착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잊혀져 있다가 1807년 여름에 소나타 작품번호 57로 출판되었고 브룬스비크 백작에게 헌정되었다. 〈열정〉이라는 부제는 출판당시 함부르크 출판업자 크란츠가 이 곡의 폭풍과 같은 열정의 선율에 압도되어 명명하면서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다.

이 작품에 대해서처럼 피아니스트들이 많은 이야기를 남긴 경우는 드물 것이다. 피아니스트 에드윈 피셔는 “소나타 예술의 극치”라고 하였고, 피아니스트 빌헬름 캠프는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지상적인 힘에 대항하는 인간의 투쟁을 그리고 있다.”고 말했다.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브렌델은 “지금까지 피아노에서 야기된 가장 눈부신 폭발을 그곳에서 목격하게 된다”고 하였다. 한편 평론가 러츨러는 “냉정을 잃지 말고 연주하거나 들을 때면 이 작품 속의 거칠게 소용돌이치는 패시지에서도 희열을, 그리고 격정적으로 동요하는 선율 속에서도 그것을 억제하는 통제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라며 이 작품이 단순히 격정의 폭발로만 시종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였다.

이 곡은 베토벤의 모든 피아노 소나타 가운데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 중의 하나로 연주 자체도 어려운 반면 그 내용 역시 쉽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이 곡이 가지고 있는 불타는 듯한 에너지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으면서도 절제된 고결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음악은 격렬하게 파도치고 있는 반면 그 음악적 구성은 티끌만한 결점도 없이 풍요로운 열매를 완벽한 음악적 조형으로 끌어올려 드높은 정신세계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 곡의 흐름은 마치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같이 가슴속에 숨겨진 묵언의 열정과 같다. 깊은 땅속으로 꺼져가다가 갑자기 솟아오르듯 상승하면서도 폭발하는 주제는 그 첫 발걸음부터 피아니시모로 마치 폭발직전의 활화산처럼 깊은 명상에 잠겨있다. 폭발의 여진 속에서 빛과 위안처럼 등장한 제2주제가 휘몰아치는 광풍 속에서 제1주제와 맞부딪쳐 서로를 휘감고 있는 것이다. 첫 악장에서 겪었던 폭풍이 잠들면서 제2악장의 안단테는 평화롭고 잔잔한 전원 풍경을 그리며 격정의 가슴을 쓰다듬고 있다. 그것은 좀처럼 안식을 얻지 못했던 베토벤이 늘 갈구했던 동경의 ‘아르카디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안주하지 않고 다시 제3악장에서 그 정적은 부수어지고 프레스토로 휘몰아치는 격정으로 다시 치달아가게 된다.

제1악장 Allegro assai 첫머리부터 곡은 팽팽한 긴장의 연속이다. 제1주제가 마치 땅속에서 머리를 쳐들어 올리는 모습을 하면서 음악은 난폭해져서 건반을 휩쓰는 듯 지나가고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뜨거운 음악적인 고조를 보여준다. 이 고조의 절정에서 몇 차례 `운명의 테마'가 강조된다. 그런 후 음악이 서서히 사그라지면서 템포를 떨어뜨리고 불길한 느낌의 `운명의 테마'가 고요하게 몇 차례 반복되다가 완전히 음악이 정지한다. 제2악장 Andante con moto 음악의 깊이는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다.

단정하게 정돈된 분위기 속에서 깊은 표정의 주제가 엄숙하게 제시되고 변주를 거듭해 나갈수록 음악은 고조되어 나간다. 마치 격하 투쟁적인 열정이 이 악상들 속으로 매몰되어가는 것처럼 운명이 예정된 듯하다. 제3악장 Allegro ma non troppo 앞 악장에서의 격한 화음을 연속해서 두들겨대고 계속 아래로 하강하여 주제를 제시하고 마지막 프레스토의 코다에서 무곡풍의 새로운 주제로 강렬하면서 앞도적인 효과를 내면서 모든 장애를 극복하는 듯한 기세로 막을 내린다.

■ 들을만한 음반 : 에밀 길레스(피아노)(DG, 1980); 빌헬름 박하우스(피아노)(Decca, 1959);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피아노)(RCA, 1960); 빌헬름 캠프(DG, 1965); 프리드리히 굴다(피아노)(Amadeo, 1972); 루톨프 제르킨(CBS, 1962); 백건우(Decca, 2008)

오재원〈한양대 구리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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