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 족 불 욕
지 족 불 욕
  • 의사신문
  • 승인 2011.02.17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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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기간에 시간을 내어 풍란을 다시 정리했다. 말라버린 뿌리를 일부 잘라내고 작은 돌 위에 풍란을 앉혔다. 돌 주변을 수태로 채워 뿌리 주변에 습도가 어느 정도 유지되도록 했는데 2년째인 올해는 자리를 잘 잡고 꽃도 풍성하게 피었으면 좋겠다.
이번 설 연휴는 집에서 보냈습니다. 설날 아침 부모님께 차례를 올리고는 딱히 한 일이 없습니다. 매일 먹을 아주 많이 갈았습니다. 왕희지의 난정서 서첩을 옆에 놓고 한자 한자 살피며 먹을 갈고 또 갑니다.

세상으로부터 점점 멀리 떨어집니다. 1660년 전 화창한 봄날 난정(蘭亭)에 4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초목은 싱그럽고 사람들은 유쾌합니다. 술잔을 기울이며 세상을 논하고 시를 주고받습니다. 시흥에 젖어 시문을 가다듬어 적으면 다른 이가 이에 화답합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시문이 어느덧 하나의 책이 되고 나니 당대 명사 중의 명사인 왕희지에게 붓이 넘어옵니다.

`영화 구년(永和九年)'으로 시작되는 서문은 거침이 없습니다. 어느 한 글자도 똑같은 모양새로 반복되지 않고 획 하나하나에 군더더기 없이 신이 내린 듯 써내려갑니다. 약간의 취기가 있는지 써 내려가다가 중간에 빠진 글자를 옆에 적어 넣기도 하고 혹은 이미 쓴 글씨 위에 써 넣기도 했으며 아예 먹을 덧칠해 지우기도 하며 서문을 완성했습니다. 지켜보는 이들의 입에서 감탄의 말이 그치지 않습니다.

연휴 기간 내내 집에서 왕희지의 난정서를 몇 번이고 옮겨 썼습니다. 먹물이 적당히 준비가 되면 화선지를 펴고 붓에 먹물을 흠뻑 적신 뒤 다시 먹물을 빼 붓끝을 잘 정리 합니다. 잠시 화선지 위에서 멈추었다가 천천히 운필을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멎고 세상이 사라집니다.

화선지 한 장이 다 채워지면 그 때부터 애달픈 마음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획이 삐뚤어지기도 하고 너무 두껍기도 하고 혹은 그냥 힘없이 늘어지기도 합니다. 흉내라도 내 보겠다고 애를 써보아도 그저 마음뿐입니다.

습자한 화선지는 쌓이는데 글씨 모양새가 좋아지고는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도 첫날의 습자보다는 오늘이 조금 나은 듯 보입니다. 지금은 못생긴 글씨를 타박할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괜찮습니다. 그래서 또 먹을 갑니다. 벼루 위에서 먹 갈리는 소리가 사각사각 들리고 나는 다시 그 정자 곁을 맴돕니다.

`독서백편의자현'이라 했는데 백번쯤 임서를 하면 조금은 그럴 듯한 글씨 모양새가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참으로 교만한 생각임을 압니다. 저 단단한 단계연 바닥이 움푹해질 때까지 무수히 많은 먹을 갈고 글을 쓴들 서성으로 불리는 이의 글씨를 한갓 범부가 어찌 흉내조차 낼 수 있을까요.

문득 설 전 페이스북에 어느 분이 올린 글귀가 눈앞에 아른 거립니다. 지족불욕 (知足不辱). 도덕경에 적혀있는 구절이라고 합니다. 내 부족함을 알고 어디쯤에서 만족해야 할지를 알라는 뜻일까요. 욕심이 지나쳐 탐욕이 되지 않도록 경계하라는 뜻일까요. 습자한 화선지가 쌓이며 내 부족함도 함께 쌓여갑니다. 내 글씨를 남에게 자랑할 생각이 없으니 글씨로 인해 욕된 일을 겪지는 않겠지요.

내일 퇴근 후 쓸 먹을 또 갈고 있습니다. 준비되어 있는 먹은 많고 화선지도 충분합니다. 벼루도 쉽게 닳지는 않을 것이니 이렇게 쓰고 또 쓸 것입니다.

오근식〈건국대병원 홍보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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