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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향의산 봉천산
망향의산 봉천산
  • 의사신문
  • 승인 2011.01.31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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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균<성북 이정균내과의원장>

이정균 원장
봉천산(奉天山, 291.1m)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북단 양사면과 하점면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봉천산은 반나절 산행하기 알맞은 산이다. 세계문화유산인 송해면 부근리 고인돌과 봉가지(奉哥池), 봉은사 오층석탑과 석조여래입상을 돌아보고 나서 하점면 사무소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산림욕과 원점회기 산행을 즐길 수 있는 산행지다. 산 정상에 서면 예성강 하구, 조강(祖江)건너 북한땅 개풍군이 눈에 들어온다. 날씨가 좋은날에는 개성 송악산도 볼 수 있는데 송악산까지의 직선거리는 20km밖에 안되는 곳에 봉천산이 자리하고 있다.

봉천산은 그 산 이름에서 느낄 수 있듯이 예로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왔다. 조선시대에는 봉화를 밝히기도 했던 곳이며, 고려 때 국태민안을 기원하던 제단 봉천단(奉天壇)이 너비 7.2m 높이 5.5m의 정방형 사다리꼴로 복원되어 있다. 산 정상에 서면 주변 바다와 멀리 북녘땅을 조망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 실향민들은 명절이 되면 가족과 함께 북한땅을 바라보며 제사를 올린다.

봉천산은 민통선 남쪽에 있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으며, 가장 북쪽에 솟아있는 산이다. 봉천산은 낮은 산이지만 `망향의 산'이라는 각별한 이름으로, 6.25전쟁 이후 이 산을 오르내리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 새겨진 산이다. 강화는 나의 고향이다. 60여년 전 초등학교 시절에는 봄, 가을 소풍을 다녔던 산이다. 어렸을 때는 산이 무지 높아 보였고 산 정상의 제단 밖에 보이는 것이 없을 정도로 높아보였는데 지금은 동네 뒷동산에 머물고 있으니 세월 탓일까. 소풍을 인솔하셨던 담임선생님들은 옛날 고서적을 들고, `하음백 봉우'라고 하셨던 말씀이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봉천대는 고려 후기에 평장사(平章事)로서 하음백(河陰伯)에 봉해진 봉천우(奉天佑)가 쌓았다는 설이 있다. 봉천우는 자신의 선조가 발상(發祥)한 은혜를 기념하고 그 덕을 가리기 위해 산 정상에 대(臺)를 만들어 봉천대(奉天臺)라 했다고 한다.

고려사의 기록에는 1234년(고종21년) 강화로 천도해서 피난온 고종이 개성의 봉은사(奉恩寺)를 대신하여 세운 이 절에 행차하여 연등회를 했고 참지정사(參知政事) 차척(車倜)의 집을 강화 봉은사에 귀속시켰으며, 민가를 철거해 왕이 행차하는 연로(輦路)를 넓혔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인천광역시 기념물 18호인 봉천대는 고려 때는 축리소(祝釐所)로 사용되었으며 조선 인조(1633)때 이후 봉화대로 사용되었고 봉은사는 폐사되었으나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축리소의 `축리(祝釐)'란 부처님에게 향을 사르면서 복을 비는 행위인 `행향축리(行香祝釐)에서 나온 말로 축(祝)은 빈다는 뜻이고 리(釐)는 복이란 의미로서 축리는 복이나 소원을 비는 행위를 일컫는다. 고려는 불교국가여서, 일반 백성이나 임금들이 복을 비는 경우 절에서 `행향축리'행사가 많았고 정월 초하루나 보름에 국가의 안녕과 왕실의 번성,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행향축리가 성행하였다고 전한다. 봉천대에 관해서는 부근리 봉가지(奉哥池), 석조여래입상, 하음봉씨의 시조 봉우와 그 5대손 봉천우에 관한 전설이 이어지고 있다.

고려 예종2년(1107년), 오늘날의 송해면 부근리에 사는 어느 노파가 연못가에 물을 길러갔을 때 천둥번개와 우레 소리가 일어나며 우물 수면에 석함이 떠올랐다 한다. 뚜껑을 열어보니 아기가 있었고 임금에게 아기를 보냈다 한다. 그 아기는 3세에 글을 읽는 천재였고, 그가 바로 봉우(奉佑)였으며 고려 인조 때 등과했고 무수한 공을 세워 하음백에 봉해졌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하음(河陰) 봉(奉)씨가 탄생하였다 한다. 하음 봉 씨 5대손 봉천우는 봉은사를 지어 보답했던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강화도에서 유일한 고려시대 석탑으로 봉은사지 오층석탑이 있다. 높이 3.5m, 보물 10호다. 이 탑이 발견되었을 때는 도굴로 인해 무너져 있었고 1960년에 다시 세웠던 탑이다. 그 상륜부와 5층 지붕돌이 아깝게도 없어졌고, 남아있는 지붕돌과 몸돌마저 파손되었고, 3층부터는 몸돌 없이 지붕돌만 포개져 있는 상태다.

오층 석탑은 개성 봉은사에 있던 탑을 고종19년(1232년) 수도를 강화도로 옮길 때 함께 옮겨졌다고 알려지고 있다. 또 하나의 고려시대 석조여래 입상은 보물 615호다.

봉천산은 동네 뒷산처럼 낮지만 울창한 수림, 뛰어난 조망은 일품산행지다. 산의 남쪽, 하점면 신봉리 48번 국도상 하점면 사무소 주차장이 산행기점이다. 주차장 왼쪽 산림욕장은 소나무숲이다. 소나무숲을 가로질러 산길은 이어진다. 등산로 옆에는 해미석, 황토볼, 맥반석, 콩자갈에 시멘트를 섞어 128m 건강지압 도로를 만들어 놓았다. 소나무 숲에 이어 참나무 숲이 급경사나무 계단길로 이어지며, 운동시설 지구를 만나게 된다.

봉천산 산행전에 봉천산 밑에 위치하고 있는 고려시대 오층석탑과 석조여래 입상을 찾아가는 방법이 산행 후 역사지식 습득에 큰 도움이 될 듯싶다. 행복한 `숲길 걷기', 그리고 `게으른 산행'은 봉천산을 찾는 메리트가 될 것임을 확신한다. 비록 낮은 산이나, 사철 마르지 않고 흐르는 봉천산 샘물은 엄지손을 꼽을 만 하다고 하니 시음해봄이 어떠실지!

이정균<성북 이정균내과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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