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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라노(富良野)의 휴일
후라노(富良野)의 휴일
  • 의사신문
  • 승인 2011.01.27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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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설경속에서 보낸 값지고 행복한 가족여행

박형보 원장
내가 외국행 비행기를 타 본 것은 아마도 7∼8년은 되는 것 같다. 진료실을 비우기가 쉽지 않았고 또 국외에 나갈 특별한 일도 없었으려니와 그보다는 건강을 핑계 삼아 안 나갔던 것이 큰 이유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뜻밖에도 큰 딸 가족 세 명과 함께 일본 홋가이도의 후라노에 가게 되었다. 이번 여행이 처음 가는 가족여행 인데다 다섯 사람이 앞뒤로 무리지어 앉고 보니 여행자체가 즐겁고 기분도 한결 상쾌할 뿐 아니라, 여행의 주목적이 외손자 두 녀석(열 살과 열두 살)들의 스노보드에 있었기에 녀석들의 기분과 사기는 이미 눈밭에 가 있었다.

하늘에서 밑을 내려다보니 태백준령인 듯 싶은 산등성이에는 하얀 눈이 덮여 있었고 얼마 있다 먼 하늘을 바라보니 위로는 투명한 하늘이요 아래로는 솜털보다도 더 하얀 뭉게구름 사이사이로 쪽빛 동해바다가 펼쳐보였다.

이륙한지 두시간 남짓 지났을 때 앞 천장에 붙어 있는 네비게이터의 화살표는 우리의 목적지 아사히가와에 다다르고 있었고, 곧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라는 기내 방송이 있었다. 한참 책을 읽다말고 밖을 내려다보니 이번에는 한국 땅을 내려다 볼 때와는 판이하게 다르게 군데군데 상록수림을 제하고는 온 산야가 흰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내가 갔던 곳은 홋가이도의 삿뽀로에서 동북쪽으로 약 세시간 거리에 위치한 아사히가와에서 다시 남동방향으로 한시간 남짓의 거리에 있는 후라노라는 곳이었다. 이곳은 나에게는 전연 생소한 곳이고 또 떠나기 전에 아무런 여행정보도 갖지 못하고 떠났던 터라 나는 이곳이 산간오지의 콘도급 자그마한 호텔인줄 알았었으나 막상 당도 하고보니 후라노시 인근의 아늑한 산자락에 위치한 훌륭한 뉴프린스호텔이었고, 로비에는 일본사람들을 위시해서 미국인 한국인 중국인 베트남인 등등 국제적인 면모를 다 갖춘 일류 호텔이었다.

가서 알았던 것이지만 후라노 스키장은 홋가이도에서 뿐 아니라 전 일본에서도 내로라는 스키장이었고, 또 이 스키장의 특색은 호텔의 훌륭한 시설 뿐 아니라 다른 스키장에서는 볼 수없는 호텔의 후문과 스키장이 바로 연결되어 있어서 더없이 편리한 곳이었다.

간단한 입실수속을 마치고나니 오후 3시쯤이 되어서 남은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기 위해 우리 일행은 완전무장을 하고 부리나케 눈밭으로 나갔다. 밖에 나가보니 황홀한 설경에 탄성이 절로 났다. 여러 갈래의 슬로프와 눈 덮인 산, 아련히 멀리보이는 들과 소도시의 지붕들, 모두가 은백의 세계였다. 말 그대로 백설이 만건곤 하다고나 할까.

켜켜이 쌓여서 스키와 보드로 다져진 눈, 발아래서 들리는 뽀드득거리는 소리는 어쩌면 그렇게도 아름답고 또 정겨울까. 티 하나 섞이지 않는 하늘이 내린 이 보물은 햇볕을 반사시켜 우리들의 눈을 한없이 부시게 했다.

슬로프를 몇 차례 오르내리다 보니 어느새 어둠이 깔려왔다. 우리 일행은 내일을 기약하고 식당을 찾았다. 첫날 찾았던 식당은 일식요리였다. 식사는 미리 패키지로 정해진 터여서 먹고 싶은 대로 먹을 수 있었다. 정갈한 일품요리였다.


훗가이도 후라노에 도착하니 온세상이 은백의 세계에 탄성
멋지게 스키 타는 손자 녀석들 바라보니 대견하고 감동 받아
산상카페서 따뜻한 차 한잔·스키 후 온천욕 즐기며 여유만끽



스키장은 리프트 세개에 100명이 탈수 있는 곤도라가 하나 있었다. 표고 800m 1200mm의 정상에서 쏜살 같이 미끄러져 내리는 스키어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 마음도 저절로 상쾌해지려니와 그들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선수급 스키어들 틈에 끼여 그들 못지않게 타고내리는 손자 녀석들을 보고 있으니, 우리들의 마음이 한없이 기뻤고 또 그들이 너무도 대견해 보였으며 짜릿짜릿한 감동까지 받았다. 특히나 열 살짜리 작은 녀석의, 슬로프를 내려 오면서의 좌우로의 회전묘기는 그야말로 멋지고 환상적이었다.

우리는 한동안 딸네 식구들의 보드를 구경하고서는 곤도라를 타고 정상의 까페에 올랐다. 곤도라에서 내리니 공기는 차가웠으나 하늘은 맑고 햇살은 두터웠다. 난생 처음 찾는 산상의 까페인지라 감개무량하려니와 주변의 설경은 아름답다 못해 황홀하기까지 했다. 멀리 보이는 담청색의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줄지어 어디론가 떠가고 있었다.

여기서 마시는 따끈한 차 한 잔의 맛을 어디에 비하랴? 비록 짧은 시간이나마 이 곳 이 순간이 나에게는 다른데서는 가져보지 못한(할) 가장 행복한 시간이 아니겠는가? 시름도 가시고 고민도 사라지고 세속의 번민도 하늘의 구름 따라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니 말이다.

우리 둘이서 오손 도손 이야기 나누면서 얼마간 쉬고 있으니 두 손자들이 들어오고 이내 뒤 따라 딸이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녀석들은 스테이크에 햄버거에 또 스파게티까지를 각자의 입맛대로 시켜 단숨에 해치우고는 콜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후라노의 여행이야기들로 꽃을 피웠다. 큰 손자 녀석은 잿빛 하늘에 바람이 없고 설질(雪質)이 너무도 좋아 보드타기가 최고라면서 부랴부랴 동생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니 어느새 보드를 장착하고 두 형제가 사이좋게 슬로프를 내려가고 있었다.

후라노는 홋가이도의 중북부에 위치해서 9월 말경부터 이듬해 5월까지도 눈이 내려, 1년 중 약 6개월은 스키를 탈 수 있다고 했다. 스키장 사람들은 외국인도 많았으나 대부분은 일본사람(아마도 그 곳 사람들인듯 싶었다)들이었고 남녀노소가 모두 즐기고 있었다. 특히나 이곳 사람들은 만 세살만 되면 스키를 배운다면서 그 어린애들을 엄마 아빠들이 다리 사이에 넣고 가르치고 있으며, 어떤 아빠들은 높은 슬로프에서 부터 아빠와 어린애가 허리에 줄을 매고 천천히 내려오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한번은 한 아이가 스키를 너무도 잘 타기에 나이를 물었더니 다섯 살 이라고 대답해서 나는 깜짝 놀란 적도 있었다.

와서 보니 이 곳 후라노는 겨울 한 철의 휴양지만이 아니라 여름에는 청량한 피서지와 라벤다꽃의 축제로 유명해서 겨울철 보다 훨씬 휴양객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했다.

우리 일행은 보드타기가 끝나면 식사를 해야 하는데 이 시간만 되면 우리는 행복한 고민을 해야 했다. 양식으로 할까? 일식으로 할까? 아니면 프랑스식으로 할까? 다섯 사람의 의견은 항상 일치하지 않았다. 다수결도 통하지 않았다. 마침내는 어른들은 두 손자의 의견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최후에는 양식 부페였다. 자기들 입맛대로 또 마음껏 먹고 마실 수 있어서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이었다.

저녁을 실컷 먹고 나면 이번에는 온천욕으로 행하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다섯 사람이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고서 하루의 피로를 말끔히 풀어주는 시간이었다. 고급스런 시설에 청결한 온천수는 추위와 운동으로 굳어진 근육을 이내 사르르 녹여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의 노인성 가려움증도 이곳의 온천욕으로 온대간데 없어졌다. 날마다 매연에 파묻히고 소음에 시달리고 또 업무에 찌들었던 신경과민성 가려움증이었기에 이곳에서의 맑은 공기와 해맑은 약수(온천수)에서는 맥없이 사라진 것이 아닐까?

돌아오는 길에는 의례히 오락실에 들러 손자들과 에어학키의 게임을 즐겼다. 당구대와 똑같은 다이에서 학키의 퍽과 같은 것을 상대편 구멍으로 밀어 넣는 게임이었다. 재미있는 게임이었고 나는 작은 손자에게 번번이 지고 말았다.

4박 5일의 여행이 재밌고 알뜰하게 끝났다. 비록 길지 않은 날이었으나 고급스런 여행에 또 가족끼리 그리고 조손간의 여행이었기에 그 어느 때 보다도 값진 시간이었고 추억이 담긴 여행이 되었다. 언제 또 다시 이런 여행이 있을까? 똑같은 가족과 똑같은 여행을 한다 해도 그때는 또 다르겠지? 이미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변하고 서로의 감정이 달라져서 이번 같은 순진무구한 기쁨은 오지 않으리라. 생각해 보면 이번 여행은 훗날에 우리가족의 이야기 한 편이 담길 뜻 깊은 여행이었다.

그동안 나는 불과 며칠이나마 세상과는 벽을 쌓고 근심걱정 없이 지냈다. 잘 자고 잘 먹고 때로는 책을 보고 때로는 눈밭에 나가 손자들의 보드 타는 것을 보면서 무료하지 않게 지냈다. 신문도 없고 TV도 못 보고 집과의 통신도 두절되었으니 옛날 시골농촌의 빈자(貧者)의 생활과 다름없었다고나 할까. 우리나라의 정쟁, 수뢰, 부정부패, 온갖 사기와 협잡, 숱한 사회의 비리, 거기에 북한의 공포까지… 하루도 긴장 없이 편한 마음으로 살 수 없었던 생활에서 해방되었으니,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무념(無念)과 비상(非想)의 시간들을 보내지 않았는가? 이것이 바로 행복이요 마음의 평화인가 싶었다.

날이 밝아 커튼을 재치니 침실 앞 저 멀리에 만년설을 이고 있는 이름 모를 고산준령이 해돋이의 불그스레한 아침 햇살을 받아 웅대하고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오늘따라 아침의 햇살은 엊그제 보다 유난히도 반짝였고, 또한 다정스럽고 서기(瑞氣)어린 햇살이었다. 우리들의 떠남을 미리 알고 보내온 석별의 아쉬움이었을까? 우리가족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단란한 아침식사를 마치고서 눈 내린 자작나무숲 사이 길로 귀국길에 올랐다.
 

박형보 <강북 박내과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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