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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루를 씻다
벼루를 씻다
  • 의사신문
  • 승인 2011.01.26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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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더 많은 날을 붓과 함께 한 후라야 화제와 이름 석 자를 올릴 수 있을지.
벼루를 씻었습니다. 미지근한 물에 담가 한참을 불렸다가 그냥 맨 손으로 살살 문지르니 더께로 붙어 있던 먹이 풀리기 시작합니다. 그저 빨리 씻어내려면 수세미로 쓱쓱 문지르면 될 일이지만 행여 벼루 바닥에 흠이라도 생길까 조심스럽습니다. 비록 비싼 벼루는 아니지만 앞으로도 오래 쓰고 싶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에 인사동 필방을 방문했다가 문득 탐이나 데려왔습니다. 중국에서 만든 단계연이라는데 진짜 단계연인지는 모를 일입니다. 특별한 문양이 조각되어 있지도 않고 크지도 않은 그냥 평범한 벼루인데, 다만 연지 위쪽에 강낭콩 크기의 맑은 옥색점이 하나 박혀 있습니다. 대야의 물이 흐려질수록 벼루의 옥색 점은 선명해집니다. 새로 맑은 물을 받아 벼루를 한 번 더 헹구고 나니 뭔가 큰일을 해낸 듯 뿌듯합니다.

내친김에 붓을 빨았습니다. 청자연적도 헹구어냈습니다. 먹물 얼룩을 닦아내자 날고 있는 학의 모습이 선명해집니다. 몽당 먹을 집고 있는 대나무 먹집게까지 씻고, 문진에 묻은 먹물 흔적까지 깨끗이 닦아내고 나니 마음이 한층 더 흡족해졌습니다. 손가락 끝이 먹으로 거뭇하게 물들었습니다. 수세미를 이용해 몇 번이나 비누로 닦고 나니 손도 비로소 깨끗해집니다.

스무 살 때 철도청 공무원 생활을 하며 불규칙한 출퇴근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하루 이틀 보내는 시간이 아까워 처음 글씨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서예 교실에 일주일에 두 번도 가고 많이 갈 때는 세 번도 가며 서너 달을 빠져 지냈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 계속하지 못했습니다.

군 복무까지 마치고 27살에 느지막하게 대학을 입학하고 다시 붓을 잡았습니다. 막연히 아주 먼 훗날 직장 생활을 끝내고 살아가야 할 그 때가 되면 무엇을 하며 살아갈지 고민하지 말고 미리 소일거리 하나쯤은 배워두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 밖에 없어서 졸업 후에는 어떻게 하든 좋은 직장을 잡고 알차게 돈을 벌어야 하는 처지에 참으로 사치스러운 생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훌쩍 시간이 가버렸습니다. 그동안 결혼하고 집장만하고 아이들 키우고 부모님을 보내드렸습니다. 생각해보면 분주하고 부산한 시간이 빨리도 지나갔습니다.

짬짬이 글씨를 쓰겠다고 심하게 큰 테이블을 들여놓고도 오랫동안 붓을 잡지 못했습니다. 먹 갈고 글씨 쓰는데 서너 시간이면 충분한 것을 그 서너 시간을 내 시간으로 쓰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쩌다 우연찮게 인사동 필방에 들를 때마다 사 모은 붓은 이미 십여 자루가 넘고 먹도 꽤 많습니다. 탁본 글씨첩은 수십 권입니다. 연적도 몇 개 되고…

먹을 갈고 왕희지의 난정서를 흉내냈습니다. 붓은 꼬이고 획은 너무 크거나 너무 작습니다. 애달파도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오늘은 이만 써야겠습니다. 먹이 아직 남아 있으니 난을 칠 생각입니다. 두 선으로 봉황의 눈을 그리고 세 번째 선으로 그 눈을 째고 지나갑니다. 그러나 글씨가 되지 않는데 난이라고 마음먹은 대로 될 리 없습니다. 선을 힘이 없고 꽃은 둔탁합니다. 화제는 포기해야 하겠습니다.

훗날 붓과 벼루와 먹과 종이 그리고 연적과 문진을 친구삼아 살고 싶습니다. 아직 무엇을 먹으며 어디서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준비는 되지 않았는데 무엇을 하며 살 것인지를 먼저 생각합니다. 오랜만에 맛보는 한가한 저녁시간입니다.

오근식〈건국대병원 홍보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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