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8 22:50 (목)
베토벤 〈장엄미사〉 작품번호 123 
베토벤 〈장엄미사〉 작품번호 123 
  • 의사신문
  • 승인 2011.01.06 09: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교회음악 넘어 민중을 위한 오라토리오

바로크시대에 교회음악은 청중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악이었으나 계몽시대를 지나면서 교회음악은 점차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그 배경에는 첫째, 시대 변화에 따라 당시 청중은 지루한 미사 통상문이 아닌 새롭고 흥미로운 내용을 원했다. 둘째, 당시 신교가 대부분인 독일 지역에서는 가톨릭 미사곡을 연주할 이유가 없었다. 반면 가톨릭국가이었던 오스트리아는 교회가 아닌 콘서트홀에서 미사를 연주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이 시기의 미사곡 등 종교음악은 당대 작곡가의 명성에 걸맞지 않은 대접을 받았다.

이런 환경의 변화 끝에 위치한 작품이 바로 19세기 초에 나온 하이든, 훔멜, 그리고 베토벤의 미사곡이었다.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궁정악장으로 봉직을 하고 있던 하이든이 노환으로 더 이상 작곡이 힘들게 되자 그를 대신해 임무를 맡은 사람은 모차르트의 제자이자 베토벤의 라이벌인 건반 연주자 요한 네포무크 훔멜이었다. 그러나 1807년 에스테르하지 후작은 하이든의 제자이었던 베토벤에게 중요한 미사를 위한 곡을 맡겼다.
 
당시 베토벤은 피아노 협주곡 제4번과 교향곡 제5번, 제6번을 작곡할 만큼 가장 창작력이 왕성한 시기였다. 베토벤은 자신의 첫 미사를 작곡하면서 “지금까지 거의 시도되지 않은 방식으로 가사를 다뤘다”며 자신만만하였으나 결과는 대실패였다. 후작은 “이보게, 베토벤, 이게 지금 뭔가?”라고 비아냥거렸고, 훔멜은 곁에서 비웃었다. 화가 난 베토벤은 1812년 당시 작곡한 미사곡을 출판할 때 다른 후원자인 페르디난트 킨스키 공작에게 헌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첫 미사곡이 지닌 표현력과 섬세함, 통일감은 놀랄 만큼 공들인 것이었다. 만년에 쓰게 되는 〈장엄미사〉를 예감케 하는 많은 점을 담고 있다. 첫 미사곡에 실패한 베토벤은 10년 뒤 자신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던 루돌프 대공이 모라비아의 올로무츠 대주교로 임명된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이듬해 예정된 취임식에서 장대한 미사를 연주하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러나 〈장엄미사〉를 작곡하기 시작한 1819년은 베토벤이 청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해였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 작곡을 한다는 건 초인적인 투쟁이었다. 더구나 이 무렵 건강도 급속히 나빠져 하루에 두세 시간 이상 작곡을 하기란 불가능하였다. 결국 〈장엄미사〉는 5년이 지난 후에 완성되었고 러시아 니콜라이 갈리친 공작이 후원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되었다.
 
당시 비엔나 공연에서는 콘서트에서 교회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 곡 제목은 `세 개의 대찬송가'로 바뀌었고, 라틴어 미사 통상문 대신에 독일어 가사로 대체해 불렀다. 당시 그는 〈장엄미사〉를 “나의 모든 작품 중 최고의 대작”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한 편지에서 “연주자와 청중 모두에게서 깊은 신앙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작품”을 의도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비평가들은 〈장엄미사〉가 너무 웅장하고 교향악적이어서 가톨릭 전례음악으로는 적절하지 않다고 비판했고, 이는 베토벤이 과연 진정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니고 있었던가에 대한 논란으로까지 이를 정도였다.

베토벤은 신앙이 깊은 사람이었다. 만년으로 갈수록 청력을 상실하고 심신이 지쳐가고 있을 때 그의 작품에서의 종교성은 더욱 깊어져 갔다. 그는 죽기 전에 가톨릭의 성사를 받았다. 마치 바흐의 〈B단조 미사〉가 하늘의 영광에 순응하고 주께 경배하였다면, 베토벤의 〈장엄미사〉는 하늘을 향해 간절하게 외치고 구원을 얻기 위해 투쟁하는 듯 삼위일체 중 성부보다는 성자 쪽에 더욱 호소하는 듯하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나고 십자가 위에서 희생한 존재에 스스로 깊이 공감했던 것이다.

베토벤의 〈장엄미사〉는 교회음악을 넘어 민중을 위한 오라토리오이자 순수한 음악의 결정체인 것이다.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합창〉도 〈장엄미사〉와 같은 해인 1824년에 초연되었다. 이 두 대작이 인류의 화해와 평화를 희구하는 베토벤의 열망을 동시에 담아내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장엄미사〉의 마지막 곡은 `평화를 주소서'라는 말로 끝을 맺고 있다.

■들을만한 음반 : 오이겐 요훔(지휘), 암스테르담 콘세트헤보우 관현악단(Philips, 1970);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 베를린 필(DG, 1966); 존 엘리어트 가디너(지휘), 잉글리시 바로크 솔로이스츠(Archiv 1989); 오토 클렘페러(지휘), 필하모니아 관현악단(EMI, 1965)

오재원〈한양대 구리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