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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서산, 서해바다와 억새평원
오서산, 서해바다와 억새평원
  • 의사신문
  • 승인 2010.12.23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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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바다·은빛 억새평원 속에서 누린 가을의 여유

일요일 새벽 집을 나섰다. 아직 모든 것이 어둠에 잠겨 고요하다. 상강(霜降)이 지나니 이제는 아침 공기가 제법 쌀쌀하다. 올 여름 유난히 무더워서 그랬는지 오랜만에 느껴보는 새벽공기의 차가움이 오히려 반가웠다. 압구정동 주차장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회원들이 도착해 있었다.

이번 산행은 200명이 훨씬 넘는 인원이 참가하는 대규모 등산행사다. 연재성 총무님과 박병권 등반대장님은 산행 출발 전, 오늘 일정 점검과 준비에 여념이 없으시다. 산악회의 모든 일은 항상 뒤에서 묵묵히 자기 맡은 임무를 해주시는 임원들 덕에 큰 탈 없이 지나간다. 마음 속으로 오늘 산행도 무탈하기를 기원해본다.

7대의 차량이 서울을 빠져 나와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렸다. 서해대교를 지나 잠시 정차했던 서산 휴게소에서 문득 바라본 하늘에는 검푸른 새벽 여명(黎明)속에 짙은 구름이 촘촘히 박혀있었다. 마치 거친 붓자국과 먹의 농담이 기막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우리의 옛 그림처럼 인상적이었다. 자주 볼 수 없는 순간이었다. 카메라 뷰 파인더 속에 다시 한 번 담아본다. 또 다른 느낌이다. 이런 순간순간 사진 찍는 소소한 재미를 느껴본다.

오늘의 산행지는 충남 홍성군 광천읍과 보령시에 걸쳐있는 오서산(烏棲山)이다. 오서산은 백두대간 금북정맥의 최고봉이며, 정상 일대 약2Km 정도에 걸쳐 펼쳐진 억새밭과 서해의 낙조가 어우러지는 명소로서 시원스런 서해바다의 조망을 감상할 수 있는 충남서부의 명산이다. 해발 790m 정도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이 일대에서는 다른 산들에 비해 월등히 높고 해안선까지 거칠 것이 없어 예로부터 천수만을 항해하는 배들에게는 등대 역할을 했다고 한다. 또한 까마귀가 많이 살고 있어 오서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단순한 의미로만 받아들이기에는 무언가 아쉽다. 동북아시아 고대 신화 속에서 까마귀는 신성(神性)의 상징이었으며 태양을 의미했다. 우리 고대 문화에서도 고구려 벽화에 그려진 `세발 달린 까마귀'(三足烏)의 모습으로 그 신성함을 확인 할 수 있다. 아마도 “오서산은 신성한 까마귀가 깃들어 살고 있는 고귀한 산이란 의미로 불리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해본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버스는 어느덧 광천 IC를 빠져나와 산행 들머리인 상담마을에 들어섰다. 오늘은 이곳을 기점으로 하여 `정암사 → 오서정 → 광천 오서산정상 → 보령 오서선 정상 → 약수터 → 휴양림'으로 이어지는 소요시간 4∼5시간 정도의 비교적 가벼운 산행 코스이다. 상담 주차장에서 정암사와 만나는 임도까지는 부드러운 육산의 모습이나 그 이후로 주능선 억새밭을 만날 때 까지는 경사가 급하고 군데군데 암릉이 있는 악산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서해안 고속도로 개통과 더불어 최근 알려진 억새 산행지인지라 우리들 팀 말고도 꽤나 많은 사람들이 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본격적인 숲길에 들어서서 30분정도 지나니 정암사(淨巖寺)앞에 이른다. 1500년 쯤 전인 백제 무왕 때 창건된 고찰이라고 하나 정확한 연대는 가늠하기 어렵다. 계곡 옆에 축대를 쌓아 터를 잡고 극락전·산신각·요사채가 들어 앉아있는 소박한 분위기의 암자이다. 절에 들어설 때 처음 만나는 일주문을 범종루(梵鍾樓)의 기둥이 대신하고 있었고 수키와 암키와를 엮어 만든 담벼락이 인상적이었다.

이제 주위는 한여름 숲의 무성함과 어수선함이 가을 서리에 정리 정돈된 모습으로 바뀌고 있다. 지난 여름 사전 답사 산행 때 우리일행을 집어삼킬 듯 기운차게 떨어져 내리던 폭포 같은 계곡물도 이젠 흔적도 없이 말라 버렸다. 사람들의 삶이 어떻든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만 간다. 해우소 앞을 지나면 나무계단이 시작된다. 이제부터 오서산은 부드러운 이미지를 버리고 강인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하나 둘 셋…', 이렇게 백까지 입속으로 되낸다. 경사길의 괴로움을 극복하는 나만의 노하우다. 우리 머리위의 지능선을 지나면 또 다른 능선과 만날 것이다. 이 능선 곳곳에는 자그마한 암릉이 있으며 이곳에 서면 멋진 서해바다를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경사길에 익숙해질 무렵, 박병권 등반대장님을 만났다. 예기치 못한 지역 마라톤 대회 때문에 산행 전 행사에 일부 인원만 참석하고 대부분은 그대로 산행을 시작했다고 한다. 앞으로 산행 진행에 차질이 없도록 조금 더 긴장하자고 하신다.


억새밭·낙조로 명성 높은 오서산 부드러움·강한 모습 혼재
2개 정상석 덕에 하산길 산악회원들 큰 혼란 겪을뻔 하기도
바람소리·물소리와 숲의 향기 속에 하루 보낸것 만으로 행복



바닷가에 인접한 산들은 조금만 고도를 올려도 기막힌 풍경을 연출한다. 오서산도 우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첫 번째 나타난 암릉을 바로 올라서니 마치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착각이 든다. 서해바다와 홍성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다른 산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산 아래 풍경이다. 모두를 풍경에 취해 있을 무렵, 옆에 계시던 김현조 선생님이 주변 분들에게 저 멀리 보이는 굴뚝이 보령 화력발전소라고 열심히 설명해주고 계신다. 언제나 유쾌하고 신나는 분이다.

이제 경사길 오르막은 끝나고 한숨 돌릴 수 있는 평탄한 능선길이다. 10월말 절정을 이룬 은빛 억새사이를 지나 오서정으로 향했다. 조그만 정자였단 오서정은 그 자리에 없었다. 올 여름 유난히도 바람이 거셌던 태풍 곤파스의 영향으로 오서정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새로운 건물을 신축중이다. 솥단지 모양의 주춧돌이 인상적인 정자였는데 그 모습이 영영 사라져 버렸으니 아쉽다. 억새밭 사이로 20분정도 걸으니 광천 오서산 정상이다(해발791m). 오서산에는 정상석이 2개 있다. 보령 오서산 정상석(해발 790.7m)이 저만치 또 있다. 많은 분들이 정상석 주변에서 인증샷을 하고 정상주를 나누는 등 북새통이었다. 우리 선두일행은 발길을 옮겨 보령 `정상석'으로 향한다. 송신탑이 있는 정상 부근에서 잠시 멈춰서 산행을 정리하기로 했다. 이제부터는 능선 산행을 종료하고 휴양림 쪽으로 하산해야 했다. 은빛 억새 평원 속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는 여유를 부려본다. 녹차의 은은한 맛도 좋지만 등산할 때는 역시 커피의 진한 맛이 제격이다.

오서산 휴양림으로 이어지는 하산로는 수많은 등산객들로 인하여 움푹 패져 잡석이 드러난 급경사길이다. 흙먼지 풀풀 날리고 내려가는 사람, 올라오는 사람 뒤엉켜 혼잡스럽다. 안전시설물이 전혀 설치되어 있지 않아 겨울철에는 하산 시, 상당한 어려움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어느 정도 비탈길을 벗어날 무렵 휴대전화가 울린다.

 “회원 : 여보세요! 어느 쪽으로 내려가야 해요?”
 “필자 : 네. 정상에서 오서산 휴양림쪽으로 하산하세요.”
 “회원 : 이곳 정상에는 휴양림 표시가 없는데요.”

이내 전화가 끊겼다. 다시 통화를 시도했지만, 좀처럼 연결이 안 되었다. 순간, `휴양림 표시가 없다니 이상하다. 아하! 그렇구나! 아까 정상석이 2개 있었지. 회원들이 하산길을 혼동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다시 통화를 했다.

 “필자 : 여보세요. 저기요! 아까 거기가 아니고요, 송신탑 있는 정상석까지 오셔야 합니다. 그곳에서 휴양림 쪽으로 하산하세요.”

참으로 어렵게 통화했다. 하마터면 많은 회원들이 엉뚱한 곳으로 하산 할 뻔했던 순간이었다. 도대체 정상석이 왜 2개나 될까? 지방자치단체의 과다한 경쟁으로 인한 행정 낭비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길은 다시 임도와 만나고 조그만 샘터가 나타난다. 먼저 하산 하신 분들이 도란도란 앉아서 가을 햇살을 즐기고 있다. 막걸리도 한잔씩 하면서 말이다. 가을이 깊어 감에, 이제는 수량이 줄어 초라해진 계곡을 따라 휴양림으로 들어섰다. 요즘 캠핑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여름 성수기에는 그렇게 북적거리던 휴양림 야영 데크도 이제는 한가하다. 입안에서 살짝 단내가 나고 다리가 노곳노곳해질 무렵, 흙길은 아스팔트 도로로 바뀌어 갔다. 이렇게 오서산 산행은 끝나갔다. 찬란한 문화유적을 구경한 것도 아니고 지방 특산 별미를 맛본 것도 아니지만 오서산 바람소리·물소리, 그리고 숲의 향기 속에서 하루를 보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행복하다.

서울로 가는 버스 안에서 연신 고개를 떨구다 깨어보니 아직도 충청도 땅을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마지막 단풍놀이 때문인지 유난히도 교통정체가 심했다. 창밖은 이미 캄캄해져서 유리창엔 내 얼굴만 비치고 있었다. 올 겨울엔 눈이 많이 올까? 100년 만에 폭설이 또 한 번 내릴까? 벌써 마음은 끝없이 이어진 하얀 능선 상에 서 있다. 한겨울 찬바람을 맞으며 눈밭을 걷고 있다.

매번 산행 때마다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주시는 서울시 의사 산악회 고문님들, 그리고 사전답사 산행을 비롯해서 전반적인 산행 행사 준비에 노력을 아끼지 않은 이재일 회장님 이하 임원 여러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번 산행에 참가하신 모든 분들 건강하시고 항상 안전산행 하시길 기원합니다.



조해석<서울 관악구의사회 법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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