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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를 기억한다는 마음으로…
누군가 나를 기억한다는 마음으로…
  • 의사신문
  • 승인 2010.11.25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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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은 꽃이 질 때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내년에도 좋은 꽃을 보려면 꽃에 힘이 빠지기 시작하면 바로 잘라 주는 것이 좋다.
주말 한 친구가 부친상을 당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40년이나 연락이 끊어져 있었던 친구의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참 궁급합니다. 그들은 나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을까요. 무엇보다 소식을 전해 준 것이 고마워 한 달음에 갔습니다.

그렇게 어렸을 적 한 마을에 살며 초등학교를 함께 다녔던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대부분 이름은 익숙한데 얼굴은 도무지 낯이 섭니다. 그들과 학교에서 어떻게 지냈는지도 기억에 없고 그들이 어디에 살았는지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단 한 번의 소식도 주고받은 적이 없으니 친구라는 말을 쓰기에는 조금 멋쩍은 사이가 되었습니다.

참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지 빈소에 들어서며 서로 한 눈에 누구인지 알아보았습니다. 40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닌데 어떻게 서로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둘이 정말 친했던 사이도 아니었고 죽마고우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그도 나도 이젠 중년을 지나 노년이 더 가까운데 그의 얼굴에는 아직도 40년 전의 신중하고 사려 깊은 모습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도 내 얼굴에 남아 있는 그 시절의 모습을 보았겠지요.

그를 따라 여러 친구들이 모여 있던 접객실에서 낮선 이들의 시선을 받았습니다. 이름을 말해 주자 `아 거기 참샘이 살았던, 6학년 때 4반이었던, 공부 잘했던…' 하며 나에 대한 기억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남보다 왜소한 체격에 마음도 여린데다가 따로 덜어져 있는 작은 마을엔 또래도 없어 많은 친구들과 몰려다니지도 못했으니 나를 기억할 만한 추억 거리가 별로 없는데, 내 기억에는 도무지 없는 사건들을 하나 둘 들추어내며 그들은 나를 그들의 세계로 끌어들였습니다. 그렇게 서로 다른 조각들을 짜 맞추어 서로를 알아보았습니다.

참샘이라는 마을은 길가 작은 산기슭에 일곱 집이 있었고 우물의 물맛이 좋았던 곳이었습니다. 어느 날 산이 깎여나가고 도로가 지나가면서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언젠가 차를 타고 지나가며 살펴보니 교차로 한 가운데가 그 때 살았던 집터였습니다. 멀리 보였던 윗마을은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옛 모습이 여전히 많이 남았지만, 아랫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살던 곳은 그렇게 변했는데도 몇 마디 이야기 속에서 찾아낸 그들의 기억을 떠올리고 보니 그 때로 되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어떤 친구는 머리가 벗어지고, 어떤 친구는 머리가 온통 백발에 가까운데 그들의 표정, 웃음, 말투에는 그 때의 모습이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흐뭇한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착하고 공부도 꽤 잘했던 친구’로 나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몸도 약하고 무엇 하나 남보다 잘 하는 것 없어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그들은 나에 대해 과분할 정도로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 기억된다는 것은 참 기분 좋은 일입니다. 오늘 나의 행동과 말도 훗날 또 누군가 기억하겠지요.

기분 좋은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에 출근을 해 늦은 꽃대를 올린 살마금을 살펴보았습니다. 여전히 기분 좋은 향은 남아 있지만 꽃대를 잘라주기로 했습니다. 한 해에 꽃대를 세 번이나 올렸으니 더 두었다가는 내년에는 시름시름 고생을 할지도 모릅니다.

난은 꽃이 질 때 가장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고 합니다. 아깝지만 싹둑 잘랐습니다. 출산을 앞두고 있는 여직원의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건강한 아이 낳아 기쁨과 행복이 가득하기를 바라며 남아 있는 마지막 향을 선물했습니다.

오근식〈건국대병원 홍보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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