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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계를 일깨워준 `킬리만자로 우후르피크'
나의 한계를 일깨워준 `킬리만자로 우후르피크'
  • 의사신문
  • 승인 2010.11.15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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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 - 잠보! 킬리만자로(Mt. Kilimanjaro, 5895M) 〈6·하〉

눈덮힌 킬리만자로 정상이 보이는 마지막 키보산장의 모습
장원영 선생이 덱사를 I.V해주고 그러고도 진정이 되지를 않자, 이관우 선생이 디클로페낙을 엉덩이에 주사해줍니다. “너 디클로페낙 쇽 없지?”… 그리고는 잠시 후에 조금씩 몸이 편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콧속이 마치 플라스틱 파이프 같은 느낌이 오는 것이 아마도 공기가 점점 더 메말라가는 가 봅니다. 심지어는 아프기도 합니다. 콧속이 말라가는 것처럼 내 머리 속도 그리고 아마도 내 폐 속도 가뭄 때의 논바닥처럼 말라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아무런 생각이 나지도 않고,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등산화 색깔 같은 황토빛 흙먼지를 터벅거리며 걸어야 한다는 것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도 않고,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점심 도시락으로 여러 가지가 들어있었다는 기억은 있지만, 그냥 오렌지 주스를 옆 사람 것까지 두개를 마신 것이 전부였습니다.

살찐 닭다리 튀김이 있었지만 도저히 찐득거리는 살코기를 씹을 입맛이 없어서 어디선가 날아온 까마귀처럼 생긴 새에게 던져주고 말았습니다. 이때쯤부터는 동료들이 모여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을 때, 약간은 짜증이 나려고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진을 찍으려면 숨을 잠시 잠깐 멈추어야 하는데, 서서히 그것조차 힘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출발 전에 인터넷에서 읽은 것 중에 고소에서 숨을 멈추지 말고 사진 찍는 연습을 하라고 했는데…. 그게 그렇게 마음대로 되지를 않고, 이런 정도로 영향을 줄지도 몰랐었습니다.

산행 이틀째, 낮은 구름으로 햇볕도 없고 산행하기 좋은 날씨였다.
4750m. 키보 산장에 들어가서 내 잠자리를 정리해 놓고 밖에 나와 본다. 높은 곳에 올라야만 느낄 수 있는 벅찬 감동. 멀리 발밑으로 깔려있는 구름들과 그 사이로 언뜻 언뜻 보이는 인간세상의 불빛들….

아직 자정도 되지 않은 시각. 마지막 정상 공격을 위하여 잠자리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전혀 잠을 자지 못한 탓에 망치로 맞은 듯이 아프고 무거운 머리, 그 아픈 머리를 더 조이는 헤드 랜턴.

도저히 목구멍으로 무엇을 넘기기가 힘들어 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넣지 않은 텅 빈 뱃속.
화장실을 지금이라도 다녀 와야하는 건지 그냥 가도 되는 건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아참, 혈압 약은 언제 먹었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얇은 것 하나, 두꺼운 것 하나 두 개나 낀 장갑덕분에 스틱잡기가 영 불편하다, 그저 그냥 집어 던지고 은 생각뿐….

카메라와 물, 그리고 먹을 것 약간뿐인 배낭은 왜 이렇게 무겁고 덜렁거리는 것인지…. 서울에 가면 다시 좋은 것으로 새로 하나 사야지.

고소내의를 입고 오리털 파커를 위에 고어 텍스 자켓을 입은 탓에 서커스단의 곰처럼 둔한 몸.
두 겹이나 신은 양말 덕에 조금 빡빡한 느낌을 받는 왼쪽 새끼발가락.

날이 조금 밝아져서 화산재로 뒤 덮힌 달 표면같이 생긴 기묘한 모양의 킬리만자로 능선에 서 있었을 때에 받은 나의 느낌은 이제 막 달에 착륙한 아폴로 우주선에서 내린 우주인의 모습이라고 할까….

두 걸음을 딛고 올라서면 한걸음은 미끄러져 내려오는 빌어먹을 이놈의 화산재….
 

한걸음 한걸음 올라갈수록 고산증 심해져 몸은 점점 지쳐가
다리는 정상 향해 조금씩 움직이는데 의식은 점점 혼미해져
결국 우후르피크 앞에 두고 박병권 선생 권고로 하산 아쉬워


중간에 목이 말라 물이라도 마실라치면 두꺼운 장갑 탓에 배낭끈을 풀어헤치는 것도, 물통잡고 뚜껑 여닫는 것도 모든 것이 다 귀찮고 짜증스럽다. 물이 왈칵 쏟아져 옷섶사이로 흘러 들어와 속살이 조금 젖었을 때에는 정말로 미치는 줄 알았다.

캄캄한 한밤중에 머리에 밝힌 불빛들이 줄지어 꼭대기를 향하는 모습은 지금 생각하여도 진절머리가 날 정도이다. 저 멀리 한참 위에 있는 불빛은 최소한 내가 따라 올라가야만 하는 높이이기 때문이다.

 “하쿠나 마타타?”
 다 잘 될꺼라구? 잘 되기는 무슨…. 그냥 저절로 잘 되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킬리만자로 가이드와 함께 한컷
능선에 가까이 다가서고 옆 사람의 얼굴이 누구인지 조금씩 구분이 되기 시작했을 때 급기야 길섶에 처음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다리의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머리가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리의 힘이 빠져 산행을 포기한 적은 있어도 어지럽고 의식이 혼미해지는 것은 처음으로 겪는 경험입니다.

이십하고도 수년전 공중보건의 시절에 시골 하숙집에서 연탄가스를 마시고 강릉 동인병원 응급실까지 실려가 겨우 살아났던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그래도 두 다리는 아직도 정상을 향해서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마치 마지막 태엽이 풀리기 직전의 시계처럼….

길만스 포인트를 지나 마차메 루트와 만나는 길목 즈음에서는 이미 태양은 머리 꼭대기에서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손과 발은 차갑고, 햇볕이 쪼이는 얼굴은 따갑고…. 아니, 그보다는 얼굴에 탄다는 느낌을 고스란히 받았습니다.

내려쬐는 햇볕의 방향 때문에 커다란 바위에 드리운 명암이 마치 사람 얼굴처럼 보이기도 하고, 동물 모양처럼 보이기도 하고, 도깨비 얼굴처럼 보이기도 하고…. 나는 이미 절반 쯤 정신이 나간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저 한참이나 밑으로 보이는 분화구 아래가 그렇게 무섭게 느껴지지도 않고 그냥 저냥 휘익 하고 두 팔 벌려 날아갈 수 있을 만큼으로만 보입니다.

산행 중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등반대원들.
그렇게 두 눈이 퉁 퉁 분채로 머리를 감싸 안고 아무렇게나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있었을 때, 나는 내 생명의 구세주를 만납니다. 북한산 만경대 릿지에서 그랬던 것처럼…..

조금 더 뒤에서 올라오던 박병권 선생이 나를 발견하고는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채고는 같이 하산할 것을 권합니다. 그런…. 그만 내려가자는 그 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만년설을 지나 우후르 피크가 손에 잡힐 듯 보이는 그곳에서 돌아선 것은 정말 현명한 선택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정신이 반쯤 나가고 숨소리에서 약간의 가래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때 돌아선 것은 또 다른 기회를 위해서도 제대로 된 선택이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쩌면 나는 지구 반대편 엉뚱한 곳에서 딴 세상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니까요….

화산재가 뒤덮인 경사진 비탈을 이리 저리 넘어져 내려 오면서 춥고, 졸리고, 그리고 완전히 탈진한 상태에서 집과 가족들 생각으로 속으로 찔끔거리기도 하면서 다짐에 다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다시는 높은 데는 가지 않을 테다…”.
 5800m 이상은….
 이젠 5700미터 밑에서만 놀아야지….



신동엽<킬리만자로 원정대 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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