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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의 탈출…내 자아를 찾아 떠난 한걸음
일상에서의 탈출…내 자아를 찾아 떠난 한걸음
  • 의사신문
  • 승인 2010.11.11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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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 - 잠보! 킬리만자로(Mt. Kilimanjaro, 5895M) 〈6·상〉

◇마랑구게이트에서 출발 직후 마주친 정글속에서의 단체 사진
그림자가 어디 있는지 모를 정도로 정확히 머리 꼭대기에서 떨어지던 강렬하고 따가운 햇볕.
흔들거리며 걸어가던 검은 발바닥 아래로 푸석거리며 날아오르던 짙은 황토색 먼지.
시골길의 추억을 되새기게 해주던 낡은 도요타 트럭의 매캐한 연기.
원색의 옷감으로 휘감은 육감적인 몸매를 가진 흑인 아낙네들의 눈빛.
무언가를 항상 원하는 듯한 커다란 눈망울의 어린아이들.
그런 모든 것들과는 동 떨어져서는 머리에 흰 눈을 얹고, 푸른 하늘에 붕 떠있는 듯한 킬리만자로. 내가 서 있는 이 곳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서 있는 킬리만자로.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꿈 속 한 장면처럼….

킬리만자로 정상이 보이는 임팔라 호텔 앞 도로의 풍경. 바나나 행상의 여인네들과 토요타 트럭이 인상적이다.
마랑구게이트에서 킬리만자로 최초 등정자 `한스 마이어'의 부조를 만났을 때, 그때서야 나는 실감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그대의 뒤를 쫓아 여기까지 오게 되었노라”하고…. 그리고는 여행을 결정하였을 때부터 갖고 있던, 해낼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높은 세계에 대한 두려움에 온몸이 다시금 긴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산행이 시작되자마자 - 아직 그때까지는 산행이랄 것도 없는, 평지나 다름없는 숲속 트레킹 정도 - 나무와 풀과 바람, 그리고 그 바람에 실려 오는 생소한 냄새, 그리고 사람들 모습만큼이나 전혀 다른 형색의 아름다운 야생화들로 그런 긴장은 멀리 떨어뜨리고 카메라의 셔터 누르는 일에 온 정신을 팔리게 되었습니다. 사진 찍는 일에 금세 집중이 되어서는 일부러 일행과 조금 거리를 두고 뒤쳐져서는 혼자서 풀냄새를 맡아보려 가까이 들이대어 보기도 하고 연분홍빛 어여쁜 야생화 앞에서 한참을 웅크리고 드려다 보기도 하고, 보들보들한 정글의 나무 이끼를 만져보고 또, 가볍게 뺨에 비벼 보기도 하고 그리고는 한 움큼 훑어내어 주머니 속에 넣어가면서 오랫동안 그 부드러움을 혼자서 즐겨보기도 합니다. 아! 커다란 나무들에 얽혀 있는 이끼들이 햇빛을 받아 연녹색의 조명을 반짝이던 모습! 아직도 내 머리 속에 남아있는 환상 같은 그림중의 하나입니다. 아무리 어찌해보아도 내 실력으로는 사진으로 표현이 되질 않습니다. 조그마한 골목길처럼 나있는 길옆에서는 잠시 서서 눈과 머리로 그리고 가슴에 새김질을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다시는 보게 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산행 첫날은 6000m나 되는 높은 산에 왔다는 긴장감은 전혀 없이, 마치 수학여행 온 설악산의 여느 여관에서의 그 느낌 그대로였습니다. 2750m.

지구 반대편에서 처음 맞이하는 아침은 적당한 두통으로 인해서 세수하기도, 아침 화장실가기도, 모두가 귀찮은 상태이었습니다. 여행 시작하고 처음으로 등을 바닥에 대고 누운 탓에 서울을 떠난 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혈압약을 언제 먹어야하는지, 헷갈리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약간의 두통과 피곤함으로 시간 계산하는 것도 싫습니다.


푸른하늘에 붕 떠있는듯한 다른세상에 서 있는 킬리만자로
무거운 두려움은 산행후 형형색색 야생화들과 만나며 사라져
아무 말 없이 같은 길을 오래 걷다보니 저절로 철학자로 변해


1750 m의 만다라 산장에서 첫날 밤을 보내고 출발하기 직전의 단체 사진. 모두 밝은 표정들이다.
그래도 맑은 공기를 쐬러 나온 그날 아침, 나는 깜짝 놀라 얼른 카메라를 챙겨 나옵니다. 그렇게 맑은 하늘과 붉은 여명을 본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직접 보는 붉은 햇살도 신기할 정도이었지만, 사실은 옆에 서서 같은 하늘을 쳐다보던 다른 선생님의 붉은 얼굴과 우리의 등 뒤에 있던 나무들까지 모두가 검붉은 색으로 변해있을 때에는 마치 영화 속에서나 보던 그런 아프리카의 모습을 잠시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 점점 나무들이 없어지고 키 낮은 풀들로 주위가 변해갑니다. 멀리까지 내보이는 모습이 시원해지기도 하지만, 저 멀리까지 내가 가야하는 길이 보이면 지레 기가 죽는 것 같아 힘도 그만큼 더 드는 느낌도 생깁니다. 정상을 향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아있는 등산길은 지루하기 조차합니다. 한참을 가도 창밖의 모습이 변하지 않는 그런 기차를 타고 가는 느낌입니다. 나는 열심히 걷고 있는데, 앞을 보아도 옆을 보아도 그대로고 뒤를 보아도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런 똑같은 길을 아무 말도 없이 몇 시간씩 걷다 보면 생각이 많은 사람은 저절로 철학자가 될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킬리만자로 다녀 온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동안에 잃어버렸던 내 자신, 내 자아를 찾아….”하는 말을 하게 되나 봅니다. 어찌 보면 자기 자신밖에는 생각할, 다른 꺼리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푸른 보리밭 같은 풀들이 끝없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가까이서 보면 보리밭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느낌을 줍니다. 야영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나마 조금 색다른 풍경이라 길에서 벗어나 낮은 풀숲에서 사진도 찍고, 앉아서 누워서 푸른 하늘을 쳐다보며 잠시 여유를 부려봅니다. 누런 흙먼지 풀풀거리는 산행 길을 적당히 터벅거리며 걷는 것이 벌써 이틀째입니다. 드디어 코 안이 말라붙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부터 말라붙기 시작한 코 속은 산행이 다 끝나고 그리고도 이틀이 훨씬 지나 홍콩에 가서야 그야말로 뻥하고 뚫려서 이 세상의 공기의 신선함을 받게 됩니다.

지루할 정도로 똑같은 길을 한참을 걷고 난 후에 일행은 푸른 녹색의 커다란 나무를 발견하고 환호성을 지르게 됩니다. 커다란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이….

구름에 정상이 가려진 킬리만자로와 킬리만자로의 대표적 식물 `키네시오 킬리만자리'
`키네시오 킬리만자리'
이곳에만 있다는 마치 선인장처럼 생긴 나무입니다. 커다란 녹색의 나뭇잎 같은 것이 꽃잎이라는데 도저히 꽃같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짙푸른 하늘과 누런 들판, 그리고 멀리에서 흰 눈을 살짝 머리에 이고 점잖게 서 있는 킬리만자로…이들은 여태껏 내 머릿속에 강한 이미지로 남아있습니다. 키네시오가 군락을 이루어 장관을 보여주던 계곡의 나무다리를 지나면 곧 또 다른 산장에 도달합니다. 3750m.

이 산장에서 나는 실수를 합니다. 하루 종일 걸어오느라 피곤하고 땀도 제법 흘렸던 터라 수돗가를 보고서는 아무 생각 없이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었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비누를 잡던 내 손바닥에는 이것이 비누인지 무엇인지를 전혀 가늠할 수 없는 정말 아무런 느낌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순간적으로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얼른 숙소로 들어가서 타이레놀을 먹고 오리털 파커와 털모자를 뒤집어쓰고 슬리핑백에 들어갔지만 몸에서는 열이 나기 시작했고, 떨리던 몸은 이제는 흔들리기까지 했습니다. 체온은 39도까지 오르고 온 몸이 근육통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신동엽<킬리만자로 원정대 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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