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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가 가을이다
억새가 가을이다
  • 의사신문
  • 승인 2010.11.04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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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균<성북 이정균내과의원장>

이정균 원장
가을이 남녘으로 내려가면서 혼신의 힘을 다하여 또 다른 색깔을 쏟아내고 있다. 자연은 늘 제철에 맞는 숨고르기를 할 뿐 호흡을 멈추지 않는다. 들판의 곡식, 풀, 과일에 젖을 물렸던 가을햇빛은 차츰 그 기운을 다해간다. 가을이 짧아졌다고 한다. 간절기다. 가을, 현란한 색조, 자연의 화려한 자태를 보는 것만큼 흥겨운 놀이는 또 없다. 예부터 봄 - 꽃놀이, 가을 - 단풍놀이 그리고 이제는 억새 산행까지…

단풍은 나무 스스로 자기 정리하는 의식이다. 단풍은 말기(末期)의 색감(色感)이라 한다. 그러나 단풍은 빛바랜 낙엽이 되어 칼바람에 쓸려나가고 산하는 억새의 순백색으로 채웠다. 그래서 가을산은 단풍으로 말하고, 억새로 마무리 한다고 했는가 보다.

가을여행의 또 다른 테마는 억새다. 은근하고 그윽한 매력, 단풍이 컬러사진이라면 억새는 빛바랜 흑백사진이다. 세련미도 떨어진다. 흐린 기억 속 추억 반추의 매개체다.

늦가을 찬바람 흰억새밭, 끝없는 파도, 흰 머리카락 내맡긴 억새의 수군거림이 들리고 우리를 들뜨게 만든다.

단풍이 화려하다면 억새는 수수하다. 붉거나 노란 원색을 뽐내는 단풍에 비해 억새는 살색에 가깝다. 단풍과 비슷한 시기에 제철을 맞는데도 억새는 다소 밀리는 것도 소박함 때문일 듯 싶다. 억새는 연필스케치, 두고두고 보아도 싫증나지 않는다. 억새관광은 날씨 영향을 받지 않는다.

억새의 세상사는 법은 갈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억새와 갈대는 비슷하게 생겼다. 같은 벼과 식물이다. 갈대는 물기 많은 곳에 산다. 강가, 개펄이 갈대마을이다. 억새는 촉촉한 곳에서는 거의 만나기 힘들다. 산이 아닌 곳, 숲 가장자리, 구릉의 마른 땅에 산다. 갈대이삭은 층을 이루며 줄기에 퍼져 있고, 억새이삭은 줄기 끝에 모여서 난다. 갈대꽃은 누런색 억새꽃은 은색이다.

하얀수염 억새의 꽃은 털이 가득 붙은 억새의 열매다. 억새는 무리지어 있을 때 제멋이다. 은빛물결 억새바다가 부른다. 억새는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연악하나 무리지어 피어있으면 화려하다. 흰머리 풀어헤치고, 화려한 계절의 마지막을 이야기 하는 억새, 그것은 쓸쓸한 가을의 흔들림이다. 은빛 물결 억새바다가 부른다.

능선 바람에 출렁이는 억새의 회백색 물결은 가을이 깊어가면서 산속의 바다도 깊어간다. 9월말 10월 중순 꽃은 이듬해 봄까지 다양한 변신을 하여 등산객을 맞는다.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면 , 억새꽃 서리서리마다 맺힌 빗방울이 반짝이는 모습은 색다르다. 눈이 살짝 얹히면 한떨기 설화가 눈부신다. 억새의 절정은 10월 중순부터 11월 중순까지다.

억새산행은 가을 쓸쓸함의 정한에 다가가는 길이다. 흰머리 풀어헤치고 화려한 계절의 마지막을 이야기하는 그 쓸쓸한 가을의 흔들림이다. 바람에 색깔이 있다면 가을산 바람색깔은 갈색일게다. 파란하늘 배경삼아 억새벌판에 엷은 햇살이 비치면 억새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못다쓴 가을의 전설을 잉태한다.

갈색 추억 머금은 억새는 대자연의 교향악을 들려준다. 늦가을 높은산 능선 큰무리 억새, 바람이 노래부르면 황홀한 군무가 시작된다. 억새밭은 햇빛의 향연을 연출한다. 능선바람에 출렁이는 억새의 회백색 파도의 물결 속에 흰 머리카락 내맡긴 억새 솜털꽃의 수군거림을 듣는다. 가녀린 열매와 털은 빛을 반사한다.

억새는 하루 세 번 모습을 바꾼다. 눈이 부실정도로 화사한 억새밭은 아침햇살엔 은억새, 붉은 노을에 금억새, 달빛을 받으면 솜억새로 변신한다. 그러나 어떤 억새건 억새의 공통점은 공허, 쓸쓸함이다. 황혼에선 노인의 백발로 표현한다. 억새는 하얀손을 흔든다. 어서오라. 반가운 손짓은 아닌 듯 보내는 손짓이다. 억새의 소리는 쓸쓸하다. 억새의 버석거림은 가장 메마른 소리라 하니…

우수의 빛을 디고 있는 억새, 스산한 바람에 공명하는 사각거림은 쓸쓸하다. 힘없으며 끊임없이 고개 숙이는 그 모양은 처량하다. 금억새, 은억새가 춤을 춘다. 아니다 운다.

  “저 산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네.”
  “아아,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

으악새는 억새풀 방언이다. 억새꽃은 솜털처럼 가볍다. 산마루엔 억새꽃이 없다. 씨앗을 멀리 떠나보내려 돋은 흰털이다. 억새의 생명력은 `억새'다. 불탄 땅에서 먼저 돋고 버림받은 땅에서 앞서 자란다.

가을은 억새다. 억새가 가을이다.

이정균<성북 이정균내과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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