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17:59 (금)
아쉽고 아쉬운 '우흐르피크'…허탈했지만 감사
아쉽고 아쉬운 '우흐르피크'…허탈했지만 감사
  • 의사신문
  • 승인 2010.10.19 10: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재일 - 잠보! 킬리만자로(Mt. Kilimanjaro, 5895M) 2-2

▲ 길만스 포인트에서의 필자.
저녁식사 시간이었다. 조금 회복된 신동엽 대원도 늦게 내려와 약간의 식사를 하고 우린 남은 양주 한병을 꺼내 건배를 했다. 무사히 모든 대원들이 킬리만자로 정상에 설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면서…제법 술잔이 오갔다.

밖으로 나오니 저 멀리 불빛이 모여있는 곳이 보였다. 그곳은 우리가 이틀전 지나왔던 작은도시 `모시'의 빛이었다. 밤하늘엔 은하수인지 모를 무수한 별들이 보이고 주위엔 각국에서 온 트래커들이 모여 킬리만자로의 밤을 여유있게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둘째날이 가고 있었다
 
셋째 날 9월21일 화요일 흐림.
기온은 영하였다. 밖의 물이 살짝 얼었다. 우린 겨울 등산차림으로 바꿔입고 어제와 동일한 점심도시락 한봉지를 받고 산장을 출발했다. 초원을 조금 지나자 온통 잿빛인 황무지가 나타났다. 풀한포기 없다. 먼지만 풀풀 날리고 삭막한 길이 키보 봉과 마휀지 봉 사이로 길게 뻗어 있었다. 한발자국 뗄 때마다 먼지가 일어나고 그 먼지는 전부 코나 입으로 들어가는것 같았다.

박상욱 대원이 두통을 심하게 호소한다. 우리 트래킹중 총무간사를 맡아 여러 궂은일을 적극적으로 해준 제일 젊은 대원이었다. 부상당한 정효성 대원의 우측눈이 점점 부었다. 원정에 앞서 자택에서 몸보신 시킨다며 직접 민어회를 떠서 대원 모두에게 대접했던 이민전 대원은 고산체질인 모양이다. 국내산만 다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고산에 도전하는데도 자세에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동네축구만 하다가 월드컵에 나왔다고 농담까지 했다.

돌무더기 위에 모여 점심식사를 했다. 어제와 달리 많이 먹을 수가 없었다. 까마귀와 비슷하게 생긴 새들이 우리 주위에 몰려 들었다. 던져주는 음식물들을 잘 받아 먹는다. 장순기 대원이 힘들어했다. 신경질적이 되고 예민해졌다. 이것도 고산증세의 하나였다. 박종섭 대원도 술에 취한듯 약간 말이 흐트러졌다.

다시 걷는다. 저 멀리 키보산장이 보이고 풀 한포기 없는 사막같은 곳에 물이 살짝 고여 있었다. 마지막 샘인곳이었다. 간이화장실이 두 개 있고 앉아 쉴 수 있는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제 거의 다 와 간다. 4500m 넘는 곳이어서 모두 호흡이 짧아지고 힘들어서인지 말이 없다. 천천히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수 밖에 없었다. 주위엔 우리를 위로해줄 유일한 목표인 저 흰머리의 산봉우리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장순기 대원을 마지막으로 우린 모두 해발 4700m의 키보산장에 도착했다. 오후 3시경이다. 숙소를 배정받자마자 모두들 자리에 누웠다. 힘든 모양이었다. 김철수 대원이 침낭에서 꼼짝도 않고 누워있었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정산 등산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을 배낭에 꾸리게 하고 쉬었다. 저녁식사 후 우린 A팀 B팀 C팀으로 다섯 명씩 나누어 각 팀별로 가이드 두 명씩 앞뒤로 배치하고 맨 뒤에 포터 세 명이 우리 뒤에 붙어서 오르기로 작전을 짜고 메인 가이드인 아이작에게 지시 내렸다. 오후 6시경, 모두 각자의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수면제와 요즘 생긴 두드러기 때문에 항히스타민제 두 알을 같이 먹고 잠이 들었다. 밤 11시, 김철수 대원을 제외하곤 모두 일어났다. 아직도 잠이 쏟아지고 심하게 어지럽다.


영하의 기온속에 대원들 고산병과 힘들게 싸우며 묵묵히 등반
키보산장서 먹은 약기운 탓에 정상 등정 시작후 몸이 말 안들어
결국 카보 산장으로 돌아와 참담함 기분속 한참 잠든 후 깨어나
새벽 5시 재등정 강행…`길만스 포인트' 도착으로 아쉬움 달래


넷째 날 9월 22일 흐리다가 오후엔 갬
밤 12시 경, 팀 별로 일렬로 서서 등산을 시작했다. 20분 쯤 걸었을까? 몸이 말을 듣지 않고 술에 취한 듯 갈짓자 걸음걸이에 좌우로 몸이 심하게 흔들렸다. 가이드가 내려가야 한다고 했다. 올라 가야하는데…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고산병 증세가 아직 나에겐 없었는데 아마도 약 기운인 것 같았다. 한 가이드의 부축을 받으며 숙소로 다시 돌아왔다. 참담한 기분이었다. 침낭을 펴자마자 그대로 잠에 들었다.

한참을 잔 후 깨어보니, 새벽 5시. 밑에 김철수 대원이 보이질 않는다. 누워서 천장을 우두커니 보고 있었다. 한심했다. 일 년 걸려 준비를 해 온 것인데,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밖으로 나가보니 너무 어두워 길이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불 꺼진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다행이 한 명이 깨어나 문을 열었다. 나는 꼭 올라가야 한다며 길 안내를 도와줄 사람을 구해달라고 했다. 20분 뒤, 한 건장한 흑인이 왔다. 그와 함께 난 우리 대원들 보다 5시간 늦게 출발했다. 올라가다 맨 후미를 만나면 돌아오기로 마음먹고 올라갈 수 있을 때까지만 가보자고 마음먹었다.

산 중턱 쯤 올라갔다. 경사가 매우 심하다. 건너편의 마웬지봉 옆에서 해가 뜬다. 키보산장이 저 아래 보이고, 올라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숨이 매우 가파온다.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바위뿐이고 그 사이로 급경사를 따라 모래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그재그로 난 길을 따라 오르고 쉬길 한참 반복한다.

한스 마이어동굴이라고 하는 작은 굴을 지나 맨 먼저 장순기대원을 만났다. 길만스포인트(5681m)까지 갔다 내려오는 중이란다. 반가웠다. 남은 물을 얻어가지고 다시 오른다. 이민전 대원을 만났다. 우후르피크(5895m)까지 갔다가 제일 먼저 내려오는 중이었다. 나를 보자마자 목이 엄청 마르다고 물을 찾는다. 물을 주고 나니 나도 물이 떨어져 갔다. 마침 내려오는 영국인들에게 남은 물을 또 얻었다. 빤히 길만스 포인트가 보이는데 진도가 안 나갔다. 십 분정도 오르면 더 이상 숨이 차서 오를 수 없다. 십 분 오르고 2분 쉬고, 또 오르고….

▲ 필자를 비롯 박병권 총무부대장, 서윤석 고문〈사진 왼쪽부터〉 등 원정대원들이 잠시 기념촬영.
이용배 부대장(영등포구 의사회장), 정효성 대원(전의협 법제이사), 이관우 대원(강남구 의사회장), 강인구 대원(대구시 의사산학회 등반대장), 서윤석 고문님을 만났다. 우후루 피크(5898M)까지 다녀오신다고 했다.

60을 넘기신 분이 세분이나 계셨다. 대단 하셨다. 제일 연장자이신 고문님이 힘들어 하시며 “이 회장이 길만스포인트 다녀 올때까지 여기서 쉬고있을 테니까 내려갈 때 같이 내려가자”고 말씀하셨다. “안됩니다. 여긴 해발 5000미터가 넘어서 위험합니다. 먼저 가세요.” 뒤돌아 보니까 천천히 내려가셨다. 다행이었다. 그 뒤로 서울에서 나를 도와 온갖 잡일을 도와준 박병권 대원(서울시의사산학회 등반대장)과 신동엽 대원도 늠름히 잘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계속 올랐다. 드디어 길만스 포인트였다. 박종섭 대원이 하산 중이었다. 다섯 시간 걸려 오른 그 곳엔 아직 장원영 대원(위생병원 마취과)과 박상욱 대원이 탈진된 듯 앉아있었다. 맨 후미였다. 회색 화산재로 가득 찬 큰 분화구였다. 건너편엔 거대한 빙하가 아직 남아있었고 그 왼쪽엔 우리의 목적지인 우후르피크가 보였다. 나는 갈 수 없었다. 시간이 없었다. 장 대원과 박 대원을 가이드와 함께 내려 보낸 후 잠시 허탈감에 빠졌다.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너무 아쉬워서 다시 둘러보았다. 뭔지 모를 뭉클한 것이 올라왔다. 두 명을 제외한 열세 명 모두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무사했다. 멀고 먼 이 아프리카를 돌고 돌아 이곳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열을 쏟았던가! 고생했던 기억들이 다 날아가 버리고 가슴이 텅 빈 것 같았다. 감상도 잠시, 곧 내려가야 했다. 장, 박 두 대원이 너무 힘들어 했다. 그들을 아이작과 함께 먼저 내려보내고 곧 뒤이어 따라 내려갔다.

키보산장에서 부터 나와 함께한 흑인은 다름 아닌 우리 팀의 쿡이며 41세로 이름은 조수아라고 했다. 야루샤에서 택시운전사를 하는데 아이가 셋달린 가장이었다. 하루 일당 3불정도 버는데 아르바이트로 등산팀에서 쿡으로 일한다고 했다. 등산 내내 내가 가지고 간 과자와 양갱을 반씩 나눠 먹고 서로 물도 나누어 마셨다. 경사진 모래를 스키타듯이 미끄러지면서 수직으로 내려갔다. 재미있다. 두세 시간 정도 하산했다. 내가 내려온 뒤 한참 지난 뒤 박 대원이 마지막으로 내려왔으나 탈진상태였다. 제일 젊지만 총무일을 맡으면서 여기저기 신경을 많이 써서 그런지 고산증세가 아주 심했다. 더 이상 걸을 수가 없단다. 포터의 도움을 받아 먼저 내려 가도록 하였다.

김철수 대원은 배낭과 함께 안 보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고산증세가 너무 심해 새벽에 호롬보 산장으로 먼저 내려갔다고 했다. 우린 다시 호롬보 산장까지의 황량한 사막길을 오후의 따가운 태양을 등지고 계속 내려가야 했다. 모두가 지치고 삼삼오오 마지막 힘을 내어 먼지나는 길을 걸었다. 해가 저물 무렵 모두 호롬보에 도착했다. 숙소가 이번엔 네 군데로 흩어져 배정받았다. 이미 어두워졌고 기온은 차가워졌다. 대원들은 각 숙소에서 쉬고 있었고 이미 내려온 박상욱 대원이 누워있는 방을 찾아보았다. 다행히 그는 회복 중이었다. 강인구 대원이 어둠속에서 침착하고 능숙한 영어로 가이드와 포터를 지휘하여 각각의 카고백을 각각의 방으로 실어 나르게 했고 나는 아이작에게 한 시간 뒤 저녁을 먹을 수 있게 준비시켰다. 잠시 쉬고 얼굴을 씻고 식당에 모였다. 대원 몇이 안 보인다. 그냥 쉴 모양이었다. 등반 성공에 기뻤지만 그 기쁨을 느끼기엔 너무 피곤하고 지쳐있었다. 무려 열 네 시간이상 걸었으니 그것도 해발 5000미터에서 6000미터까지 갔다가 다시 4000미터까지…. 저녁먹을 힘도 없었다. 오늘이 추석인데 조상님께 제사도 못 지내고 일찍 잠이 들었다.
 
다섯째 날, 9월 23일 맑음
7시 30분 경 모두 식당에 모였다. 어제의 힘든 기억들을 화제를 반찬삼아 아침식사를 마친 후 사진을 찍었다. 모두 얼굴표정이 환했다. 아름다운 초원지대를 지나고 있었지만 처음 그 느낌은 반감되었다. 그러나 뒤 돌아보면 왼쪽에 키보봉과 오른쪽에 마웬지봉 사이로 펼쳐져있는 넓은 초원지대는 한 폭의 그림이었다. 이제 막 올라가는 외국인 등산객들이 우리를 부러워했다. 만다라 산장까지 쉬지 않고 걸었다. 그 곳에서 세수를 하고 잠깐 휴식을 취한 후 마랑구게이트까지 해발 2000미터를 내려왔다. 처음 이 길을 걸었을 때의 그 호기심과 긴장감은 없어지고 어느새 익숙해진 이 길을 습관처럼 걸었다. 마랑구게이트에 도착했다.

얼마나 맥주가 마시고 싶었던지 이제야 맥주 한 병에 2불 씩 주고 한 무더기 사서 진정한 기쁨의 축배를 들었다. 마지막 대원이 가이드와 함께 도착했다. 우리뿐 아니고 가이드와 포터들 모두가 무척 힘들었다고 했다. 하긴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은 한 작은 인간일 뿐인데 힘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지막 팁을 계산할 때 우리가 처음 예상했던 것 보다 더 후하게 쳐서 주었다. 한국에서부터 가지고 갔던 남은 음식(소주 한 박스, 양주 세 병, 김치, 인스턴트 카레와 짜장 등을 가지고 갔으나 등산 중에 양주 두 병만 마시고 대부분이 남았다)도 그들에게 다 주었다. 장원영대원은 자신이 신었던 등산화도 주었다. 함께 단체사진을 찍은 후 그들과 이별이었다.

조수아가 날 알아보고 “닥터리!”라고 하면서 찾아와 인사를 한다. 우린 서로 힘껏 포옹했다. 이젠 다시 볼 수 없는데…. 모시에 있는 깨끗하고 조용한 임팔라호텔에 도착했다. 뷔페식 저녁이었다. 남은 양주 한 병과 이곳 킬리만자로 맥주와 섞어 폭탄주로 마셨다. 아프리카에서의 마지막 밤을 밤새워 마시자고 호언장담하면서…. 우린 모두 승리자였다.

자신보다 높은 산은 없을 것이다. 수많은 다른 높이의 산들과 거기를 오르는 숱한 길들이 다 다르듯이 자신만의 산이 가슴 속에 있을 것이다.
우린 그 산을 정복한 것이다. 아니 계속 정복해 나갈 것이다. 브라보 !

 
이재일<서울시의사산악회 회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