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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에서
시인의 마을에서
  • 의사신문
  • 승인 2010.10.13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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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위가 깊어질 때 꽃을 피우는 보세란이 꽃 눈을 준비하기 시작할 때다. 사진은 도희라는 품종의 보세란.
여름이 거의 지나갈 무렵 휴가를 냈습니다. 그리고 그냥 생각 없이 남쪽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는 내비게이션에 맡기고 느긋하게 섬진강 길을 굽이굽이 지났습니다.

강 저편에 예쁜 집들이 꽤 많이 보입니다. 한가하고 평화롭습니다. 그쪽에서 바라보는 이쪽 풍경도 그럴지 궁급합니다.

지금 나는 시인의 집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거기엔 시인의 아버지가 지은 `아름다운 집, 그집'이 있고 시인이 한 평생 아침에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걸어가고 저녁 때 가족을 만나기 위해 다시 걸어온 길이 있습니다.

이젠 그 집이 있는 동네 어귀까지 차가 다닙니다. 논가의 작은 시멘트 포장길로 들어서는데 두엄 냄새가 후욱 풍겨옵니다. 이 냄새 언제 맡아보았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길이 좁아서 행여 마주 오는 차가 있으면 어쩌나 걱정하며 살금살금 들어갔습니다.

모퉁이를 돌아가니 저만치 길가에 큼직한 느티나무가 보입니다. 그 근처에 차도 두어 대 서 있습니다. 그냥 저곳이 시인의 마을임을 알았습니다. 경사가 완만한 산자락에 집이 꽤 여럿 자리를 잡고 그 앞엔 섬진강이 휘돌아 흐르고 있습니다. 강 건너편엔 높은 산이 가파르게 서있고, 그 때 늦은 오후의 햇살이 그 산 중턱에 걸려 있었습니다.

느티나무 가까이 차를 세우는데 저만치에 있는 마을 정자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들의 시선이 일제히 화살처럼 꽂힙니다. 내려서 가까이 갈 때까지 한 몸에 시선을 받았습니다. 인사를 하고 시인의 집이 어디지 묻는데 대답 대신 어디서 왔는지를 묻습니다. 서울에서 왔다고 말씀을 드리자 저 쪽 기와집이라고 손을 들어 알려줍니다.

시인의 집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작은 마당에 들어서니 잔디가 파랗고 담장엔 키 낮은 은행나무가 서 있습니다. 작은 툇마루 너머로 보이는 방엔 책이 가득합니다. 깔끔한 해서체의 관란재(觀瀾齋)라는 당호가 보였습니다. 무심코 보았다면 난초 란(蘭)으로 읽을 뻔했습니다. 문가에 앉은뱅이책상 위엔 언제고 돌아와 펼쳐들 책이 놓여 있습니다.

그렇게 잠시 머물다 자리를 떴습니다. 언젠가 이곳을 다시 오고 싶습니다.

여기 머무는 그 겨울밤에 조용히 눈이 내리면
하얀 앞산
밤에도 보이는 저 눈 쌓인 하얀 앞산에서
순하디순한 숫노루
울음소리를 밤새 기다리고
아침이 되면
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인
아직 아무도 건너지 않은
징검다리를 나 혼자 가만가만 건너갔다가 건너와 보고 싶습니다.

어쩌면 운이 좋아 그 앞산 어디에선가 눈 속에서 먹을 것을 찾아 헤매던 산토끼가 뜯어 먹고 그루터기만 남은 보춘화를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그루터기 주변에 쌓인 눈을 걷어내고 나뭇잎을 살짝 들추면 아마도 삼월에 피울 꽃망울이 잠들어 있을 것입니다. 다시 조심조심 덮어주겠습니다. 삼월에 또 와서 수줍게 핀 꽃을 보겠습니다. 

오근식〈건국대병원 홍보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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