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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山의 길에서 
茶山의 길에서 
  • 의사신문
  • 승인 2010.09.08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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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상태에서 난은 깊은 그늘 속에서 한 여름을 보낸다.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비로소 햇볕을 받으며 다음 해를 기약한다.
논산 육군훈련소 입소식을 하고 무수히 많은 아들들 속에 섞여 저 앞에 분홍색 티셔츠를 입은 내 아이가 걷고 있습니다. 아직은 그 모든 일이 얼떨떨해서인지 내가 서 있는 이곳, 조금 전 악수를 나누었던 이곳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고 지나갑니다. 그렇게 연병장을 한 바퀴 돌아 저쪽 다른 연병장으로 건너가 아들의 분홍색 티셔츠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까치발을 하고 서서 바라보았습니다. 무사히 건강하게 잘 해낼 것입니다.
 
 그리곤 길을 따라 그냥 남쪽으로 향해 임실군 덕치면 장암리 마을에 갔습니다. 문득, `아름다운 집, 그 집'이 있는 마을과 그 앞을 흐르는 섬진강과 그리고 그 시인이 바라보던 강 건너 앞산을 보고 싶었습니다. 언젠가는 시인이 매일 걸었던 그 길을 시인보다 더 천천히 걸어보고 싶습니다.

 덕치를 떠나 밤 아홉시가 다 되어 강진읍에 도착했습니다. 아침 일찍 다산 초당에 가려고 합니다. 오년 전에 다녀간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여러 낮선 사람들과 함께 백련사까지 걸은 적이 있는 길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휘적휘적 걸으면 채 삼십분도 걸리지 않을 그 고즈넉한 산길이 왜 자꾸 나를 부르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 때 보았던 물봉선과 며느리밥풀꽃이 아직도 피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아침 일찍 빗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제법 장하게 내리던 아침 소나기는 곧 그 힘을 다하고 저쪽 강진만 너머의 산등성이와 그곳 여기 저기 걸린 안개구름 조각들이 보일 즈음 다산초당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귤동마을은 다산초당 옛길 입구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외지사람이 지나가도 마을 사람들은 그저 묵묵히 고추를 널고 농기구를 준비할 뿐입니다. 그렇게 편안하게 그 옛길을 올랐습니다. 마을에서 다산초당까지 이르는 길은 아주 짧습니다. 중간에 시인 정호승의 시 `뿌리의 길'이 적혀 있는 길가의 표지판과 안내판을 보지 못했으면 그곳을 무심코 힘껏 밟고 지나가 거기에 다산이 걸었을 오솔길과 다산의 가르침은 받았던 윤종진의 묘가 있다는 것도 모른 채 한 걸음에 그곳에 닿았을 것입니다.

 다산초당은 본래 귤원처사 윤단이 초가로 만든 서당(書堂)이었다고 합니다. 다산은 강진에서의 유배생활 후반부의 10여 년간 이곳에 머물며 제자를 가르치며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정리해 후세에 남겼습니다.

 세월 속에 묻힌 이곳이 초당이 오십여 년 전 아닌 와당으로 복원이 되면서 다산의 흔적이 되살아나 있습니다. 초당 앞 작은 뜰에 놓인 넓적한 돌 다조는 예나 지금이나 말이 없고 오른쪽의 옆의 작은 연지엔 잉어가 그 가운데에 자리 잡은 석가산 주위를 느릿느릿 헤엄치고 있습니다. 왼쪽으로 돌아가니 소박한 샘 약천이 보입니다. 아침에 내린 비 때문에 흐린 물이 가득해 마시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초당 왼쪽에 있는 서암의 기와지붕엔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고 그나마 무너질 처지에 있는지 출입금지 테이프가 감겨 있습니다.

 초당 오른쪽의 동암을 돌아 그 뒤쪽으로 길이 나 있습니다. 동암의 모퉁이를 돌기 전에 참으로 절묘한 곳에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하나 있습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강진만 풍경이 좋습니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까지 채 일킬로미터도 되지 않은 짧은 산길은 찾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길은 패이고 넓어져 이제 길 위엔 풀 한포기 보이지 않습니다. 길 가장자리엔 꽃 대신 온갖 버섯들이 예쁘게 피어났습니다. 문득 길가에 며느리밥풀꽃 한 포기가 보입니다. 다산도 이 꽃을 보았을지 모릅니다. 이 꽃이 간직한 슬픈 이야기도 들었겠지요.

 백련사가 그리 멀지 않은 언덕에 만덕산 깃대봉으로 오르는 오솔길이 있습니다. 따라 몇 걸음 들어서니 양 옆으로 춘란이 꽤나 많이 보입니다. 올 봄에 올라온 신아는 꽤 많이 자라 숲 속의 깊은 그늘 속에서 쉬고 있습니다. 조만간 가을이 가면서 나뭇잎이 떨어지면 비로소 해를 마주하며 내년 봄에 피울 꽃대를 올릴 것입니다. 이백년 전 만덕산 기슭의 오솔길을 걸으며 다산이 보았을 보춘화가 아직 살아남아 그를 기억하는 듯합니다.

오근식〈건국대병원 홍보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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