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10:40 (금)
조선의 지식인, 선비에게 삶의 성찰을 배운다
조선의 지식인, 선비에게 삶의 성찰을 배운다
  • 김향희 기자
  • 승인 2009.02.02 11: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香희 기자의 특별한 Book Recipe 15

 모든 상황이 힘들다고 하는 이른바 ‘난세’입니다. 어려울수록 옛것에서 지혜를 찾는 성찰의 지혜가 필요한 이때 문득 조선의 선비들을 주목해 봅니다. 그들 역시 한 시대의 지식인이자 리더로 질곡 같은 시대의 중심에 있었고 어쩜 지금까지 우리가 무조건 버려야 할 허례허식의 우선순위이자 몹쓸 것으로만 치부해 온 것은 아닌지 반성도 함께 해 봅니다.

이번주 테마는 ‘조선시대 선비들’입니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성찰과 사유를 통해 그들 역시 처참한 가난과 신분의 부당함, 뼈아픈 현실의 시련 속에서도 자신의 올곧은 마음을 세우고 난세에 휩쓸리지 않는 식견과 통찰력으로 우리에게 어려운 시대를 헤쳐나가는 내면을 고스란히 전해줍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사유와 고민, 지혜를 통해 우리 역시 힘든 오늘을 헤쳐나가는 또다른 위로와 깨달음의 시간을 갖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질곡의 세월, 신념을 잃지 않았던 그들의 내면 풍경

미쳐야 미친다 정민 지음/푸른역사

누구에게나 자신들이 살아가는 시대는 항상 격정적으로 다가오는 모양이다. “이 격정 앞에 온몸을 내던져 맞부딪쳐 나가는 사람이 있고, 못 본 척 고개를 돌려버리는 사람이 있다. 뼈아픈 시련을 자기 발전의 밑바대로 삼아 용수철처럼 튀어오른 사람과, 한때의 득의가 주는 포만감에 젖어 역사에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채 스러져버린 사람도 있다”고 말하는 저자는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며 절망 속에서 성실과 노력으로 자신의 세계를 우뚝 세워 올린 조선시대 마이너이자 노력가들의 열정과 사유를 전해준다.

허균과 권필, 홍대용과 박지원, 이덕무와 박제가, 정약용, 김득신, 노긍, 김영 등 처참한 가난과 신분의 질곡 속에서도 신념을 잃지 않으며 그렇게 조선시대 지식인의 내면을 사로잡았던 열정과 만남, 그리고 일상 속의 깨달음을 이루었던 선비들의 이야기다. 특히 저자 자신은 “현실의 중압이 버거워 달아나고 싶다가도 이들 앞에 서면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고백한다.

1억1만3000번의 독서를 했다는 김득신의 노력은 엽기적이기까지 한다. 백 번을 읽고 천 번을 읽고 만 번, 억 번에 이르도록 읽고 또 읽었다는 김득신. 머리가 나빠 외워도 금세 잊어버렸지만 삶의 자리는 언제나 반듯했고 1만 번 이상을 읽은 책만 36편이었다.

정약용과 강진 유배시절 제자 황상의 일화는 삶을 바꾼 맛있는 만남에 대한 이야기다. 열 다섯 소년이었던 황상이 자신은 너무 둔하고 앞뒤가 꼭 막혔으며 답답하다고 말하자 다산은 무엇보다 부지런함이 최고라며 잔뜩 주눅 든 제자에게 기를 북돋워준다. 그 옛날 더벅머리 소년에게 던져준 오로지 부지런하면 된다던 스승의 따스한 가르침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놓게 했고 한 번의 만남으로 삶 자체가 업그레이드 되었던 것.

‘책만 읽는 멍청이’라고 자신을 폄하한 이덕무를 통해서는 “그 준열한 삶 앞에서 내 자신이 부끄러워지고 풀어져있던 자세가 저절로 가다듬어진다”고도 말하는 저자는 “인터넷 시대에 세계의 정보를 책상 위에서 만나보면서도 천하의 일은 커녕 제 자신에 대해서조차 알 수가 없는 이유”가 바로 우리 자신은 없고 정보만 있기 때문이라며 “그래서 사람들은 조그만 시련 앞에서도 쉽게 스스로를 허물고 돈을 벌수만 있다면, 출세할 수만 있다면 지금까지 소중히 여겨온 가치와 자존을 송두리째 던져버릴 태세”라고 한탄한다.

그렇기 때문에 “날마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주체를 세우는 일”임을 강조하며 “질곡의 세월 속에서도 신념을 잃지 않고 살았던 그들의 내면 풍경이 그립다”고 속내를 내보인다.

특히 “순 가짜들이 그럴듯한 간판으로 진짜 행세를 하고, 근성도 없는 자칭 전문가들이 기득권의 우산 아래서 밥그릇 챙기기에 여념이 없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풍경”임을 따끔하게 지적하는 저자는 도처에 힘들어 죽겠다는 아우성 속에 “사물의 본질을 투시하고 평범한 곳에서 비범한 일깨움을 이끌어내는 통찰력이 담겨 있는” 절망을 극복했던 지혜의 말들을 풀어놓는다.

저자의 말처럼 현실이 힘든 요즘, 옛 선비를 만나는 일은 어쩜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해주는 “나태와 안일에 젖었을 때 뒤통수를 후려치는 죽비소리” 같기도 하다. 나 역시 그들의 뜨겁고 따뜻한 마음은 오래 기억하고 싶다.

**서재, 선비의 삶과 마음을 담다

조선의 선비 서재에 들다 고전연구회 사암 쓰고 엮음/포럼

선비에게 있어 서재는 어떤 의미였을까. “살아있는 동안 한시도 멈출 수 없는 독서의 공간”이자 “스스로를 묻는 사색의 공간”이며 “벗과 어울리는 기쁨의 장소”이자 “그들 자신”이기도 했다는 것. 이 책은 그렇게 옛 선비와 그들의 서재에 관한 이야기다.

조선 당대 최고의 학문과 식견을 자랑한 선비와 서재 30곳을 통해 “옛사람들이 견지한 삶의 태도와 평생을 간직한 아름다운 가치”를 전해준다. 서재는 그냥 서재가 아니다. 선비의 그윽한 감성과 곧은 절개를 함께 담아 이름을 지었고 ‘서재에 담긴 뜻’을 통해 신념과 삶의 정취도 함께 전해준다.

이서구의 서재 소완정(素玩亭)은 “마음을 비워 바깥의 사물을 받아들이고 사사로운 욕심이나 욕망에서 벗어나 담담하게 책을 보고 즐긴다”는 뜻이다.

“거울처럼 맑게 마음을 다스린다”는 뜻의 명경신당(明鏡新堂)은 박운의 서재다. 학문의 이치를 스스로 익히며 마음을 다스리고 평소 생활에서 몸가짐을 올바르게 하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유성룡은 유학자로서의 곧은 기상과 올바른 품성을 갖고 살겠다는 뜻과 세상의 온갖 욕망과 멀리하려는 마음을 담아 원지정사(遠志精舍)라 이름 지었다.

남당의 서재 표변당(豹變堂)은 “세상에 알아주는 이 없어도 표범이 털을 바꾸듯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는다면 자연스럽게 광채가 드러나 언젠가 세상에 크게 쓰일 날이 올 것”이란 뜻을 담고 있다.

정약용의 서재 삼사재(三斯齋)는 유배지에서도 두 아들에게 학문을 해야 하는 이유를 깨우쳐주기 위해 자식 교육에 대한 열정을 담은 아버지의 따뜻한 부성을 전한다.

또 홀로 즐거움을 누린다는 독락당(獨樂堂)은 “세상과 더불어 즐거움을 누리면 여유롭지만 혼자 즐거움을 독차지하면 큰 재앙이 된다는 뜻을 반어적으로 담았다.

채지홍이 서재의 이름으로 붙인 삼환재(三患齋)는 ‘예기’에 나오는 “미처 듣지 못할까 근심하고, 들은 후에는 배우지 못할까 근심하고, 배운 후에는 실천하지 못할까 근심한다”는 ‘군자의 세가지 근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책에서도 소개되는 김득신의 서재이름은 억만재(億萬齋)다. 타고난 노둔함과 어리석음을 극복하기 위해 보통 글을 읽을 때 백 번, 천 번, 만 번, 억만 번에 이르도록 읽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처럼 단순히 책 읽는 공간이 아닌 빛나는 지성과 교양, 자연과 학문, 만남이 숨쉬던 옛 서재에서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일깨움을 배운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선비답게 산다는 것 안대회 지음 | 푸른역사

옛글을 읽다가 발견한 선비 특유의 모습과 흥미로운 사유의 자취를 모았다. 선비하면 떠오르는 틀에 박힌 화석화된 이미지가 아닌 펄펄 살아 움직이는 천년 선비들의 일상과 성찰이 엿보인다. 인생과 내면, 취미와 열정, 글과 영혼, 공부와 서책 등에서 무엇보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우리의 일상과 팍팍한 인간관계로 지쳐있는 우리에게 선비가 전하는 향기어린 사색과 삶의 진정성을 전한다.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책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권력이었던 조선으로 돌아가 '역사는 책벌레들이 만든다'는 화두로 조선시대의 책벌레들을 소개한다. 재치 있는 글 솜씨와 날카로운 시각으로 그려낸 조선의 모습과 여기에 더해 한층 더 깊어지고 넓어진 사유가 이 책에 가득하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조선의 새로운 풍경을 드러내며 책벌레들의 역사를 통해 조선 지식 역사의 큰 흐름을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김향희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