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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날의 추억 <98>
가난한 날의 추억 <98>
  • 의사신문
  • 승인 2009.01.09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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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뒷골목은 음식점과 술집이 밀집되어 있고 나이트클럽과 모텔도 많아 밤이 되면 골목 골목이 사람들로 메워져 다니기조차 힘들다. 네온의 불빛은 사람들을 어지럽게 하고 들뜨게 하며 마취시켜 버린다. 이 소란스러움은 저녁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되는데 아침에 출근할 때도 여기 저기 취해 비틀대는 젊은이들이 보이고 전날 도로에 뿌려진 술집, 특히 호빠(남자들이 시중드는 술집)를 광고하는 전단지들을 치우는 청소부의 손길이 바쁘다.

두 달 전부터 거리는 조용해졌다. 크리스마스와 12월 31일에도 거리는 한산했다. 작년 같은 흥청되고 비틀거림은 사라지고 조용하고 차분한 거리에는 옷깃을 올리고 고개를 숙이고 바삐 가정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자 사람들은 긴장하기 시작하고 거리에서 서성거리지 않고 가정으로 돌아간다.

새해 첫날 강화도에 있는 얼음 썰매장에 갔었다. 5000평 정도의 논에 물을 담아 만든 썰매장인데 어렸을 적에 집근처 논에서 타던 추억으로 즐거운 하루였고 아내와 딸들도 처음 타보는 썰매타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기차놀이도 하고 누가 빠르나 내기도 하였다. 대부분 어린애들을 데려온 젊은 부부들이었지만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와 할머니들도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국민소득이 100불도 안되던 시절의 유일한 놀이였던 썰매를 다시 타며 또 얼음위에서 팽이채로 팽이를 돌리면서 마음은 어느새 옛날로 돌아간다.

미아리와 삼양동의 언덕에는 지금처럼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았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가난하여 하루 세끼 밥을 먹는 가정은 없었다. 봄이 되면 산에 가서 나물을 뜯어다가 보리쌀과 함께 죽을 끓여 먹던지 정부에서 주는 밀가루로 수제비나 칼국수를 만들어 먹는 것이 전부였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몇 날을 굶는 것이다. 그 곳에 살던 어느 가정의 이야기이다.

그 집 아버지는 겨울에는 서울 근교를 다니면서 쌀이나 강냉이를 튀겨 주고 여름에는 아이스케키통을 메고 다니시면서 사셨다. 가끔은 옆집인 우리 집에 팔다 남은 강냉이를 갖다 주곤 하였는데 그런 날이면 우리집은 기쁨과 행복이 넘쳤다. 모든 염려와 시름이 강냉이 한 봉지로 한동안 사라지는 것이다.

그 집 막내아들이 친구였기에 그 집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밥을 굶고 일하러 나가는 아버지를 껴안고 우시면서 남편 주머니에 삶은 고구마를 넣어주시는 어머니를 여러 번 보았다고 한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같이 우시면서 주머니에 넣었던 고구마를 다시 아내 손에 쥐어 주었다고 한다. 그 고구마는 다시 세 자녀에게 돌아갔다고 한다.

긴 세월 연락이 끊겼다가 최근에 필자의 병원에서 우연히 의사와 환자로 만났다. 부모님은 돌아가셨지만 자녀들은 모두 훌륭하게 성장하여 건강한 가정을 꾸리며 살고 있었는데 친구 얘기로는 가난 속에서 가족이 한 마음으로 아름답게 살던 기억들이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먹고 살만큼 되면 지난날의 가난을 잊어버리나 보다. 가난이나 불행을 오래 기억한다고 좋을 리 없지만 가끔은 가난한 시절의 작은 것으로부터의 행복들을 기억했으면 한다.

경제가 살아나면 뒷골목은 다시 소란해지고 흐느적대면서 병원에도 환자가 늘겠지만 반갑지가 않다. 우리의 심령이 항상 가난하고 애통해져서 세상의 소란스러움으로부터 격리되어 마음의 깊은 곳에서 들리는 작은 음성에 붙잡히려한다.

새해가 시작되었다. 우리안에 있는 소란함을 몰아내고 순결하고 청결한 빛이 우리 동료의사들의 가정 가정에 가득하기를 소망한다.

이주성<인천 이주성비뇨기과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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