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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유감 <93>
겨울 유감 <93>
  • 의사신문
  • 승인 2008.11.13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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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수능일이다. 차가 막힐 것 같아 오늘 같은 날은 지하철로 출근한다. 수능일이 되면 수험생들을 얼어붙게 하는 추위가 있었지만 올해는 겨울이 오려면 아직 한참을 기다려야할 것 같다. 아름다운 단풍이 그대로 있고 낙엽이 다 지려면 멀었다.

요즘은 추위가 와도 옛날처럼 춥지도 않고 겨울다운 풍경과 낭만이 없다. 난방이 잘되는 집에서 나와 차를 타고 출근하여 난방이 잘되는 직장에서 생활하다가 퇴근한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국어 교과서에 `첫눈'이란 글이 있었다. 11월 초쯤 반 아이들이 이 글을 읽고 있을 때 창밖에는 첫 눈이 펑펑 내린 적이 있었다. 그 후에도 11월 초에는 어김없이 첫눈이 내렸다. 그 시절이 유난히 추웠던 것은 입고 먹는 것이 시원치 않은 점도 있었지만 3층짜리 건물이 별로 없던 도시 변두리에는 매서운 바람이 항상 쌩 쌩 소리를 내며 불었고 난방이 되지 않는 집의 구조는 우리를 더욱 춥게 했다.

겨울 내내 눈이 녹지 않는 시절, 그 때는 겨울이 겨울다웠다. 아이들과 여자들은 여러 가지 색들의 털장갑을 끼고 남자들은 가죽장갑을 끼고 토끼가죽으로 만든 귀걸이를 하는 사람도 많았다. 10월이 가기 전에 엄마들은 털실을 가지고 장갑과 모자와 털 조끼를 짜기에 바빴다.

겨울은 겨울다워야 한다. 모자와 장갑으로 무장하고 긴 외투를 입고 고개를 숙이고 눈 쌓인 거리를 걷는 행인들의 얼굴들은 모두 절제와 인내를 수련하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지금처럼 수다를 떨며 걷지도 않았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리지도 않고 앞만 보고 걸었다. 유리창에는 얼음이 붙어 있고 밤에 창을 열면 소리 없이 눈이 내리는 날이 많았다. 눈 내리는 밤 하늘을 보며 그냥 시인이 되고 내리는 눈을 밤새 바라보기도 하였다.

이제 도시에는 털 귀걸이를 하는 사람은 없고 털장갑을 한 어린이는 보이지 않고 엄마의 정성과 낭만도 보이지 않는다. 양지바른 고드름 달린 추녀 밑에 옹기종기 모여 놀던 개구쟁이 시절은 빌딩과 차들의 홍수 속에 사라졌다. 아랫목에 모여 앉아 화로에 밤을 구워먹으며 옛 이야기를 주절대는 낭만은 잘 들어오는 아파트의 난방으로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렸다. 이제 도시는 춥지 않다. 도시에는 절제와 인내와 연단과 정성이 없다. 분주함과 소란함, 네온사인, 경쟁, 편리함과 욕망만이 가득하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네

도시에 내리는 눈은 우리의 마음에 내리지 못하고 저만치 거리를 두고 내리는 물질일 뿐이다. 우리의 마음은 가난하지 못하고 애통하지 못하고 순결하지 못하다. 사람들은 시를 읽지 않는다. 시를 읽을 만한 정서적 에너지가 없다. 그냥 끈적끈적한 오염된 도시의 네온사인에 묻혀 하루를 지낸다.

`메밀묵 사려어∼ 찹쌀 떠∼억' 소리도 옛날의 그 소리가 아니다. 겨울의 찬 공기를 가르며 들려오는 애절한 소리가 아니라 탁한 공기를 통해 들려오는 상업적인 메마른 소리일 뿐이다.

겨울은 겨울답게 추워야 한다. 모든 오염된 것들을 없애 버리고 우리의 속사람을 연단시킨다. 첫눈이 오면 눈 덮인 오솔길을 걷고 싶고 산 속에서 하루 밤을 새고 싶다.

이주성<인천 이주성비뇨기과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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