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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은 흐른다 <92>
한강은 흐른다 <92>
  • 의사신문
  • 승인 2008.11.08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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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비가 오거나 해서 환자가 없을 때 인터넷으로 1950년대와 1960년대 한국영화를 한 달에 한 편 정도를 보고 있다. 영화가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김승호, 황해, 김진규, 박노식, 허장강, 최무룡, 장동휘, 조미령, 문정숙 등 추억의 배우를 만나는 것도 즐거움이고 정말로 관심이 있는 것은 그 영화에 나오는 그 당시의 거리 풍경과 주택구조, 입고 있는 옷과 구두, 오염되지 않은 하늘과 별과 시냇물을 보고 싶어서다.

그리고 지금과 다른 가족 간의 대화와 지금보다 한가한 삶의 속도를 보기 위함이다. 부뚜막이 있고 양은 냄비와 검은 솥이 아궁이에 걸려 있고 지붕은 기름종이로 덮여 있고 흙벽돌로 지은 집들, 자동차와 함께 우마차가 다니는 신호등 없는 도로, 겨울에 논에서 썰매를 타고 팽이를 치는 아이들, 소방서 망대가 동네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보이는 장면, 털모자와 목도리들을 보고 있으면 가슴속에 어린 시절의 향수가 바닷물처럼 저려온다.

그리고 아버지가 누런 월급봉투를 어깨에 힘을 주고 아내에게 갖다 주는 장면은 지금은 볼 수 없는 아버지의 권위가 느껴지는 가정 풍경이고 한 가족이 적어도 7∼8명이 되는 대가족도 지금은 보기 드문 광경이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제공하는 한국영화를 한 편에 500원에 볼 수 있는데 그 당시 상영된 영화 중에서 영화필름이 소실되어 자료가 남아있지 않은 영화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많은 영화들이 복원되어 볼 수 있으니 다행이다.

필자가 `오발탄' `마부' `피아골' `박 서방' `양산도' `서울의 지붕 밑'등을 극장에서 본 것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이었다. 한동안 영화에 미처 초등학교 5·6학년과 중학교 3년 동안 상영한 영화는 우리나라 영화와 외화 모두를 본 것 같다. 공부에는 흥미가 없고 성적이 바닥인 친구들끼리 삼류극장과 가끔은 개봉관을 돌아다닌 시절이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가 내 인생 중에 가장 자유로운 때가 아니었나 싶다.

극장에 들어갈 돈이 없으면 담을 넘거나 개구멍을 통해 들어가기도 하고 영화포스터를 붙인 집에 사정해 입장권을 얻어 들어가기도 하고 가끔은 친구의 도움으로 입장하기도 했는데 몰래 들어가다 들켜 혼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당시 영화는 모두 흑백이고 스토리의 전개가 느릿느릿하고 삶이 한가로운 것이 특징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비해서 지금의 삶이 얼마나 분주해지고 복잡해 졌는지를 알게 된다. 일단 영화에는 텔레비전과 고층건물이 등장하지 않고 신호등이 거의 없고 달리는 차들이 많지 않다. 영화에 비치는 공원벤치는 지금의 공원벤치가 아니고 영화에서 부는 바람은 지금의 바람과 다르게 신선하게 느껴진다. 영화 속에 나오는 가족은 지금의 가족들처럼 깨어진 가정이 아니라 아버지를 중심으로 열심히 살아가며 온 가족이 함께 모여 함박웃음을 터트리는 행복한 가정들이다.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우리 마음을 복잡하게 하지 않고 그 당시 사람들의 삶의 방향을 알 수 있게 한다.

바쁘게 살다보니 반세기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다. 컴퓨터나 핸드폰 등 그 당시 영화에서 보지 못하던 물건들이 많이 생겼고 도시의 빈터들은 사라졌고 여기 저기 흐르던 개울들은 보이지 않는다. 거리는 복잡해졌고 시끄러워졌고 분주해졌다. 하늘에 총총하던 별들은 보이지 않고 바람은 불지만 그때처럼 신선하지 않다. 넉넉한 인심들과 훈훈한 인정들은 자동차의 홍수 속에 묻혀버렸다.

조금 있으면 눈이 내릴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리는 눈은 50년 전 초가집 위에, 빈터 위에 내려 소복소복 쌓이고, 눈 내리는 창밖을 보면 알 수 없는 그리움에 친구에게 편지를 쓰게 하는 감동과 아름다움이 아니고 아스팔트위에 내려서 곧 더러워지는 번거로움일 뿐이다. 그렇지만 지금도 생명은 태어나고 지구는 공전과 자전을 계속하고 있다.

이주성<인천 이주성비뇨기과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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