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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감의 힘
장난감의 힘
  • 의사신문
  • 승인 2008.10.02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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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과 미래, 진지한 놀이에서 시작

컴퓨터에는 해킹모드가 있다. 프로그램을 짜는 것보다 하나 위의 단계로 이 모드부터 프로그래머는 일반적인 코딩의 단계를 벗어난다. 진지한 놀이가 시작되는 단계로 컴퓨터와는 더 깊은 놀이를 하게 된다. 새로운 개념을 만들거나 장벽을 돌파하는 Break Through는 성공적인 `해크(hack)'에서 시작한다. 해크라는 단어는 작은 끌이나 손도끼로 나무를 쪼아 만지작거리는 일을 말한다.

일이 진지한 놀이로 변할 때 몰입은 커다란 에너지를 낸다. `호모루덴스'라는 고전의 저자는 목숨을 걸고 싸우는 예전의 전쟁도 놀이며, 일이나 사업도 일종의 진지한 놀이와 놀라울 만큼 흡사하다는 예를 들고 있다.

아무튼 기다랗고 어려운 코드를 장난감처럼 만져 새로운 것을 만드는 에너지는 코딩에 빠져 보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러니 정작 해킹 이전에는 긴 시간에 걸쳐 만지고 노는 법을 배워야 한다. 무엇인가를 만지작거리면 반복적인 정신작용이 일어나며 교감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하나의 텍스트를 형성하는데 이 텍스트는 평생을 간다.

오디오의 디자이너나 옷의 디자이너나 하나의 규범적인 텍스트를 갖고 있다. 이것이 앰프이건 오래된 복식이건 이런 패턴은 몇 개를 갖고 있다. 이들은 오랫 동안 사람들의 머리에 남아 사고틀을 형성하고 계속 반복되는 영감을 제시한다.

자신의 영역과 텍스트를 만드는 과정은 그 다음에 계속 이어진다. 그 다음의 과정이 진지한 놀이라고 하면 이상한 어감이 들겠지만 정말로 즐기지 않고서는 변화란 기대할 수 없다. 소비자들의 해크 모드는 차를 오래 동안 타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인가 한마디씩 리뷰를 던지는 것이다.

말이 길어졌지만 자동차의 세계에도 텍스트가 있다. 여기서 텍스트는 자동차 그 자체다. 사람들은 차를 몰고 생각하면서 차에 대한 많은 것들을 리뷰한다. 디자이너의 영감 역시 자신이 열심히 타거나 관심이 있던 차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미래의 디자이너나 엔지니어를 자극하는 것은 오늘의 실용차다. 소비자의 미래 차에 대한 선택기준도 오늘의 차에서 나온다. 자동차 회사의 광고나 브로셔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상상 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아반테나 소나타가 미래차의 영감이라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이것들을 엔지니어들이 열심히 주무르고 만지지 않는 한 Break Through 나 Ground Breaking은 오지 않는다.

이제 다시 미니와 작은 차 이야기로 돌아가자. 영국에는 묘한 엔지니어링 능력이 있는데 아주 빈약한 설비나 장비로도 혁신을 일으키곤 한다. 이른바 실과 도르래 수준의 장비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에서 근본적인 것을 꺼내는 것이다.

자동차에도 많은 혁신이 작은 공방이나 작업실 수준에서 일어나곤 했다. 과거 F1 레이싱을 승리로 이끈 엔지니어링 회사가 알고 보니 작은 창고 수준의 작업실이었다던가, 랠리 업계의 변속기를 모두 주름잡는 회사가 가족단위의 공장이라는 식이다. 어떤 아이디어를 꾸준히 테스트하고 생각하는 것에서 이런 발전이 가능하다. 사실 옆에서 보면 갑갑하기 그지 없겠지만 꾸준히 생각한 일을 밀고 나가는 점은 놀랍기만 하다. 이들의 출발점은 무엇인가 현재의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여러번 반복하여 검토하고 변형해 보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일에는 도르래와 실같은 작은 장난감이 필요하다.

미니에 고성능이라는 DNA를 심어준 존 쿠퍼(John Cooper)의 장난감은 작은 차였다. 젊은 시절의 이시고니스 역시 작은 차를 가지고 차에 대한 경험을 쌓았다. 공통점은 마이크로카급에 속하는 오스틴(Austin) 7이라는 차였는데 이 차는 미니보다 더 작은 차라고 볼 수 있다. 차는 싸고 저렴했다. 이시고니스는 학생시절 오스틴 7에 자신이 만든 수퍼차저를 달고다니며 모터스포츠에 입문했다. 쿠퍼는 레이서가 되었고 레이싱 팀을 조직했다. 베니어판에 양철판을 두들겨 만든 차는 많은 개선의 여지가 있었으나 우수한 설계를 바탕으로 좋은 교과서가 된 것이다.

차를 꾸준히 타면서 개선하고 차축이나 엔진에 대한 생각을 바꾸곤 했다. 이시고니스는 자신이 개량한 뒷차축의 설계를 메이커에 넘기기도 했다. 미니나 영국의 모터스포트는 이런 아이디어들이 괴짜들에 의해 몇 십년 동안 축적된 결과물이기도 하다. 오스틴 7은 1922년 생산이 시작되어 1939년 중단됐으나 그 후로도 몇 십년 동안 사람들은 이 차를 가지고 장난치기를 멈추지 않았다.

혁신적인 설계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갑자기 툭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많은 다양성 풀 속에서 선택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혁신 역시 과거와 현재의 영향(풍토)에서 자유롭다고 보기 힘들다.

안윤호〈송파 대광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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