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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85>
행복 <85>
  • 의사신문
  • 승인 2008.09.16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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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 더운 오후, 낡은 병원을 조금 새롭게 하기 위해 인테리어를 구상하고 있는데 어느 중년 여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이주성 원장님이시죠?” 개업초기 간호사로 근무한 적이 있는 - 그 당시 25세의 처녀였던 - 분으로 남편을 따라 일본에 가 살고 있는데 일시 귀국하여 지나던 중 병원 간판이 그대로 붙어 있어 혹시나 하고 전화를 걸었단다.

아들은 일본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고 남편과 재미있게 살고 있다고 한다.1년 정도 근무하다가 결혼한다고 그만둔 팝송을 좋아하던 아가씨였다. 환자도 없던 개업 초기 항상 이어폰을 끼고 팝송을 들으며 팝송의 의미를 나에게 설명해주던 발랄한 아가씨였다. 필자와 간호사 한명이 근무하며 환자와 나눈 대화보다 간호사와 팝송에 대해 나눈 시간이 더 많던 때였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병원 앞에서 노점을 하며 과일을 팔던 아줌마들은 이제 할머니가 되어 오뎅과 떡볶이를 팔고 있고 구두를 닦던 청년은 중년이 되어 아직도 구두를 닦고 있다.

신호등도 없이 한적했던 병원 앞은 차들로 붐비고 낮은 건물들로 운치가 있던 도시는 어지러운 빌딩의 숲 때문에 잘 보이던 먼 산이 보이지 않아 가슴이 답답하다.

하루하루 변화 없는 삶을 살며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고 지냈지만 이 한 통의 전화로 시간이 많이 지났음을 느끼게 되었고 갑자기 내가 늙어버린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고 지나간 병원일들이 필름처럼 넘어갔다. 그 동안 여러 명의 간호사가 우리 병원에서 근무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여자 간호사는 결혼을 계기로 그만 두거나 임신을 하게 되면 사직을 했고 결혼을 한 여자 간호사는 보통 자녀들이 학교에 입학하게 되면 병원을 떠난다.

짧게는 1년 근무한 간호사도 있지만 보통 3년에서 5년 정도 근무했고 10년을 근무한 간호사도 있다. 3년 정도 근무하다가 말없이 필자의 병원을 그만두고 필자를 힘들게 한 간호사가 2년만에 수녀가 되어 수녀복을 입고 나타나서는 “학교 졸업하고 바로 달려오는 겁니다. 2년 동안 외출이 없었어요. 그 동안 원장님께 미안한 마음을 하나님께 기도하며 회개했습니다”라고 말했던 간호사도 있었는데 그녀는 후에 수녀 복을 벗고 결혼하여 섬에서 잘 살고 있으며 가끔 바다에서 잡은 생선을 보내온다.

5년을 근무다가 결혼하고 임신해 그만둔 간호사는 아기와 남편과 함께 가끔 방문하는데 어제는 명절을 앞두고 들러 과거 근무할 때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회상하기도 하였고 서로 사는 모습들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10년을 근무하다가 그만두고 다른 곳에서 일하는 간호사는 가끔 방문하기도 하고 메일이나 전화로 안부를 묻는다.

오늘은 최근에 필자의 병원에 근무하면서 사이버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한 25살의 청년이 선물을 사들고 방문했다.

필자의 병원이 경영이 넉넉하지 못하고 필자의 성격이 참을성이 없어 간호사들을 힘들게 한 적이 여러 번 있어 항상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이렇게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고맙고 감사하며 항상 복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오랜 단골환자들은 병원을 새롭게 단장하는 것을 싫어하는 눈치이고 여기저기 낡고 떨어져 나간 책상과 의자가 더 친근한 모양이며 그것이 필자의 모습과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것같다.

나이를 먹어가고 모습은 늙어가지만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환자와 간호사와 이웃이 있기 때문에 외롭지 않고 행복하고 기쁘며 필자를 늘 건강하고 새롭게 만드는 것 같다.

이주성<인천 이주성비뇨기과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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