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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생 의학사랑 이문호선생을 기리며
한평생 의학사랑 이문호선생을 기리며
  • 권미혜 기자
  • 승인 2004.12.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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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의학계의 거목, 靑峰 李文鎬선생.
타고난 열정과 집념으로 한 평생  '의학 사랑 60년'을 실천하며 한국 의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그가 5일 제자와 후배들의 敬畏속에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났다.

이 땅의 진정한 프론티어 정신으로 한국 의학계의 신화를 창조하며 당대 최고의 리더십을 발휘해 온 靑峰은 '큰 스승'의 삶을 접고 이제 한국 의학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전설'로 남겨졌다.

우리나라 핵의학과 혈액학, 신장학, 갑상선학의 태두로서 그가 이룩한 학문의 창조적 업적들. 그리고 의학회, 전문의제도, 의료인 국가시험등 제도적 기반 정립에 쏟은 열정은 후학들에게 고스란히 이어져 생에 귀감이 되고 있다.

그러나 선생을 따르는 제자들은 이 같은 신화적 행보에 앞서 선생의 다정다감한 성품과 소탈함, 따뜻한 배려와 보살핌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특유의 카리스마에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절대 권위로 한국 의학계를 이끌어 온 선생의 올곧은 사상과 철학은 항상 '푸르른 봉우리'처럼 청정하게 한국 의학계를 지켜갈 것이다.     

  ""어려운 제자들의 학비를 챙기시고, 제자들의 기쁜 일, 슬픈 일을 언제나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많은 제자들은 혈육이상의 정을 느껴왔습니다. 또한 의학을 넓게 보시고 그 첨단의 길을 항상 포착하여 제자들에게 지도, 독려하셨던 일이 기억에 남습니다""

  선생이 타계한 직후 한 제자의 회고담이다.
우리나라 내과학은 물론 의학계의 사표요 지주로 눈부신 활동을 펼쳐온 선생은 사실 정이 많고 자상한 嚴父의 모습에 가까웠다.
그런 일관된 삶을 살아온 선생은 생전에 ""의사이자 의과대학 교수로서 우리나라 의학사와 궤적을 함께 하는 인생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보람있는 일인지 모른다""고 말해왔다.

일제의 멸시피해 의학도 꿈 키워

  선생은 일제의 간섭과 멸시로 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로 경성제대 의예과에 지망, 작은 꿈을 키워갔다.
1946년 경성대학 의학부를 졸업, 서울의대 내과학교실에 입국한 뒤 1957년 독일 프라이부르흐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한국의료의 진단과 치료분야를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우리나라 핵의학의 선구자로서 한국 최초로 동위원소진료실을 개설했다.
당시 신학문인 방사선동위원소를 이용한 핵의학을 연구한 뒤 귀국하여 곧 바로 서울대병원에 우리나라 최초의 동위원소 진료소를 개설, 핵의학의 효시를 이루었다.
독일에서 배운 핵의학과 혈액학, 신장학 및 갑상선학 분야의 신학문을 국내에 도입하여 임상의학에 접목, 발전시킨 공로는 의학계의 큰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서울의대 교수로서 연구와 진료, 후학양성등 본연의 업무에 몰두하면서 서울시의사회 및 의사신문등 의료계 활동에도 적극 참여, 우리나라 의학 및 의료의 균형적인 발전에 큰 공을 남겼다.
이 같은 의학사랑에 대한 집념의 길을 돌아보면서 선생은 생전에 ""누군가가 가야할 길이었기에 개척자의 심정으로 나의 길을 묵묵히 걸어왔다""고 술회했다. 

""개척자 심정으로 의학향해 매진"" 토로

핵의학 효시 등 한국의학 근간 세운 기둥

  이어 서울의대 내과동문회 창립, 함춘내과지 창간 등 내과교실의 체제를 완비한데 이어 1980년 이후 서울의대 암연구소 소장직을 맡아 세계로 웅비하는 연구소로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왔다.
그간 국내외 학술지에 발표된 논문만도 450여 편에 이른다.
우리말로 된 교과서가 전무하던 당시에 내과학 저술을 비롯, 갑상선학, 한국형 출혈열, 임상핵의학, 감상선세포진등 세부 전공 교과서를 연이어 저술함으로써 국적있는 의학교육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러한 업적으로 1975년 대한민국 학술원 저작상을 수상했고 학술원 회원으로 활동했다.

한국의학계의 개척자

  선생은 오늘날 한국 의학을 세계무대에 당당하게 올라 설 수 있도록 기틀을 잡은 한국 의학의 개척자이다.
서울의대 재직당시인 1977년 7월 서울의대 암연구소 제4대 소장에 취임한 이래 특유의 열정과 집념으로 첨단 암연구발전에 초석을 다졌다.
취임후 서울대병원 건립사무실 내부를 실험실로 개조한 뒤 미국 교육차관을 도입, 약 150만불에 해당하는 현대식 실험기구를 도입하여 본격적인 연구활동의 기반을 마련했다.
1987년에는 암연구재단을 설립, 후학들의 암연구에 필요한 연구비를 지원하기 시작했으며, 최근에는 우수 연구상을 시상, 지원하고 있다.  

  1960년 10월 아시아권 최초로 대한핵의학회를 창립, 15년간 회장을 역임하면서 핵의학적 기법을 이용한 다양한 시도로 우리나라 핵의학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육성 발전시키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이러한 공적으로 1961년 3·1 민족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우리나라 내과학 분야에 있어서도 대한내과학회 회장, 이사장을 역임하는 동안 내과학을 학문적, 제도적으로 정비하였다.
이어 1972년부터 94년까지 22년간 대한의학회 전신인 대한의사협회 분과학회 협의회회장을 맡아 한국의학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 기간에 전문의 제도 개선 및 분쉬의학상 제정등 현재까지 이어지는 수 많은 업적을 남겼다. 

  우리나라 의학 발전을 위한 희생적인 노력은 의학계는 물론 사회 각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 의학 수준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활약도 눈부셨다.
1979년 아시아대양주혈액학회를 유치하여 성공리에 끝냄으로써 그 후 많은 국제학회가 우리나라에서 개최되는 귀감이 되었다.
1980년에는 아시아 대양주 핵의학회장에 피선, 한국인으로서 국제학회 회장이 되는 진기록을 남겼다.
이어 1983년 아시아 지역 최초로 아태 핵의학회를 장충체육관에서 성공리에 개최, 한국 의학이 국제무대로 진출하는 첫 계기를 마련했다.
1988년에는 의료인배출의 산실인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을 설립, 명실공히 보건의료인 국가시험제도 발전에 근간을 마련하는 한편 한국의학의 발전을 주도하는 수많은 인재를 배출해 왔다. 

의학전반의 혁신주도

  선생은 서울의대 교수를 거쳐 1988년 아산과의 첫 인연을 맺었다.
서울아산병원 초대 원장을 맡아 의학교육의 제2의 혁신을 이뤘다. 이어 의료원장, 상임고문등을 주요 보직을 맡아 서울아산병원이 현재와 같은 국제 경쟁력을 갖춘 최고의 의료기관으로 발전하는데 성장 기반을 제공했다.  

국시원 설립/수많은 제자 배출 등 큰 족적

3대 편집인 역임한 본지에 남다른 애정

  한국 의학계 발전에 끼친 공로로 3·1문화상을 비롯해 대한민국 학술원상, 국민훈장 모란장,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을 수상했으며, 한국과 독일 양국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독일 정부가 수여하는 십자공로대훈장을 수상했다. 
선생은 회고록 ‘의학사랑 60’을 통해“나는 다시 태어나도 의사이자 의과대학 교수이고 싶다”고 할 만큼 의학 발전과 후학 양성에 매진하여 한국 의학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선생이 길러낸 수많은 제자들은 현재 국내외 의학계에서 최고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으며, 그가 걸어온 참 스승의 길을 이어받은 후학들이 뒤를 이어 존경받는 의사상의 길을 잇고 있다.

본지 편집인, 언론문화창달

  의사신문사 편집인을 역임한 선생의 '신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각별했다.
서울시의사회 명주완 회장 당시 본지 제3대 편집인(1961-67)을 역임, 희생과 열정을 다해 신문제작 일에 매진하면서 의사신문이 전국 회원들의 명실상부한 대변지이자 공기로 자리매김하는데, 또 오늘날 최고 명성과 권위의 기관지로서 위상을 확고히 하는데 기여했다.
선생은 사석에서 늘 ""신문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생의 큰 보람이었다""며 ""5년여 서울시의사회 활동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중 하나가 바로 의사신문이었다""고 자심감있게 털어놓곤 했다.
의사신문에 남다른 애정을 간직해 온 선생은 본지를 통해 '의학 사랑 60년'의 기반이 되는 회고록을 집필했다.
타계 직전인 1일 가진 서울시의사회 창립 89주년 기념행사는 물론 한국암연구재단 이사장으로서 보령암학술상 운영위원회에 참가하는등 마지막까지도 젊은 연구자들의 연구의욕 고취와 지원을 위해 심혈을 쏟아왔다.  

큰 스승의 발자취 남겨

  화려한 명성과 치적뒤로 제자들에게 늘 넉넉한 그늘이 되어 준 청봉 李文鎬선생. 팔순을 넘긴 고령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연구실에서 늘 문예춘추를 탐독하는등 독서삼매에 빠져들곤 했다.
11월말, 따뜻한 햇빛이 쏟아지던 어느 날 오후. 서울대암연구소 1층에 마련된 한국암연구재단 이사장실에서 기자를 부르신 청봉 선생은 25일 신라호텔에서 열린 제14차 분쉬의학상의 자랑스러움에 대해 얘기하신 뒤 암연구재단이 주최하는 보령암학술상 연구비 인상안등 '취재거리'를 챙겨주시곤 일본 NHK 스모 경기 구경을 위해 귀가를 서두르셨다.
마지막까지 열정적인 삶의 자락을 놓치지 않으신 청봉 이문호선생의 그 환한 미소는 각별한 제자 사랑의 정신과 함께 선생을 더욱 빛나게 했다. 

  한국 의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의학계의 거인을 떠나 보내면서 2001년 6월 대담 당시 남기신 어록이 귓전을 때린다.
""의학은 다른 학문과는 달리 일생을 건 모험이요, 투쟁이며, 자기와의 끊임없는 대결이다""
비록 선생은 가셨어도 그가 남긴 의학에 대한 열정과 집념은 영원히 후배와 제자들의 가슴속에, 또 한국 의학 100년 역사속에 스며들어 빛을 발하리라. 

권미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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