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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양귀비의 몰락
<수필>양귀비의 몰락
  • 승인 2004.12.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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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의 몰락


성상규(성내과의원

금천 정보이사)

 

 원래 양국충은 안록산과 연합하여 이림보를 제거하려 하였으나, 이림보가 먼저 죽자 그들 사이에 세력 다툼이 일어났다.
양귀비를 등에 업고 점점 그 세력을 확대해 가는 안록산에게 위협을 느낀 양국충은 현종 앞에서 자주 안록산을 비방하기 시작하였다.
양귀비는 자기 애인을 비방하는 양국충의 말을 그대로 안록산에게 전하게 되었고, 그후 안록산은 양국충에게 반감을 가지고 그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현종은 안록산이 반역을 꾀하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때마다 양귀비가 안록산을 변호해 주어 아무런 손을 쓰지 못했다.
양귀비는 조정의 일마저도 마음대로 주물렀던 것이다.

 어양(魚陽)의 북소리 천지를 뒤흔들어, /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을 깨뜨려 버렸다. / 구중궁궐에 불길이 솟아 오르고, / 수천만의 수레는 서남으로 피난갔다. (백거이의 `장한가' 중에서)

 755년 마침내 안록산은 간신 양국충의 타도를 명분으로 내세워 범양(范陽)에서 반란을 일으켜 장안(長安)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 소식을 접한 현종은 깜짝 놀라 가랑비 내리는 한여름 새벽에 승상 위견소(韋見素), 양국충, 양귀비 자매와 소수의 호위병을 거느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장안성 연추문(延秋門)을 벗어나 서쪽으로 방향을 잡은 일행은 마외파(馬嵬坡, 지금의 섬서성 興平)에 이르렀으나, 병사들이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현종에게 양국충과 양귀비를 비롯한 양씨 일족들을 모두 죽이기를 강요했다.
결국 양국충과 일족들의 목이 잘리고 시신이 갈기갈기 찢어졌으며,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양귀비도 어쩔 수 없이 마외역관 앞의 배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결하였다.

이때 양귀비의 나이 38세였다.

 비취 깃발 흔들흔들 가다가 서다가, / 서쪽으로 성문을 나서기 백리 남짓, / 육군(六軍)이 꿈쩍 않아 어쩌지도 못하고, / 어여쁜 여인은 말 앞에서 죽어갔네! // 꽃 비녀 떨어져도 줍는 사람 하나 없고, / 비취 깃털, 공작 비녀, 옥비녀도 버려졌네. / 황제는 얼굴 가린채 구해주지 못하고, / 돌아보는 얼굴엔 피눈물만 흘렀네. (백거이의 `장한가' 중에서)

 안록산의 난이 평정된 후 당현종은 태상황(太上皇)이 되었고, 그의 아들 숙종(肅宗)이 난을 평정하면서 황제라 칭하였다.
현종은 장안으로 돌아온 후에도 죽은 양귀비를 잊지 못하고 얼마나 그리워하였는지 모른다.

 저녁이면 날아드는 반딧불에 그리움은 더해지고, / 외로운 등잔불을 돋우느라 잠 못이루네. / 서서히 울리는 종소리에 밤은 더욱 길어져, / 반짝이는 은하수에 동이 트려 하는구나. // 싸늘한 원앙 기와 서리꽃 피어나니, / 차가운 비취 이불 뉘와 함께 같이할까? / 아득히 사별하여 해가 다시 지나가도, / 영혼은 꿈속으로 찾아오지 아니하네. (백거이의 `장한가' 중에서)

 그리고는 당대의 대시인 백거이는 `장한가'에서 마지막으로 그들의 비극을 이렇게 마무리지었다.

양국충 타도 명분 안록산 반란 일으켜

피난길 육군 강요에 끝내 양귀비 자결

죽은 양귀비 못잊어 그리운 나날 보내

 

 장구한 천지도 끊일 날이 있겠지만, 이들의 한은 끊일 날이 없으리라.

 양귀비의 죽음에 관해서는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즉 일설에 의하면 안록산의 난 때 양귀비가 죽지 않고 일본 상인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현재 일본에는 양귀비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그녀의 유물과 사당, 무덤 등이 전해지고 있다.
양귀비가 38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서 30년간을 활동하다가 68세에 죽었다는 것이다.

 흔히 양귀비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때 `수화(羞花 : 꽃이 부끄러워 한다)'라는 말을 쓴다.

 하루는(아직 현종을 만나기 이전) 양귀비가 정원에서 꽃구경을 하다가 무성하게 꽃이 핀 모란과 월계화 등을 보고 덧없이 지나가는 청춘을 아쉬워하였다.
그래서 `꽃아! 꽃아! 너는 해마다 다시 피어나지만 나는 언제나 빛을 보겠느냐?'라는 한탄과 함께 눈물을 흘리하면서 그 꽃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갑자기 꽃받침이 오그라들고 꽃잎이 말려들어갔다.
그녀가 만진 꽃은 바로 함수초(含羞草)였던 것이다. 이때 한 궁녀가 그러한 광경을 보았다.
그후 그 궁녀는 가는 곳마다 `양귀비가 꽃과 아름다움을 견주었는데 꽃들이 모두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고 소문을 내었으며, 여기에서 `수화(羞花)'라는 말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양귀비는 다소 통통한 체형이었던 것 같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미인형은 대부분 날씬하였는데, 이러한 날씬형의 미인으로는 조비연(趙飛燕)이 가장 대표적이다.

 그후 당대에 이르러 중국의 미인은 양귀비처럼 통통한 체형이 표준이 되었다. 당대에는 경제적 발달과 함께 음식문화가 발달하여 육식을 많이 함으로써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찐 체형이 되었으며, 그 결과 미인의 기준도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현대의 여성들은 몸매를 날씬하게 유지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며 다이어트를 하는데 비해, 양귀비와 당대의 여성들은 먹는 것과 미의 기준을 일치시켰으니 실로 대단한 의식의 전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양귀비는 당도가 매우 높은 `여지(열대 과일의 일종)'를 즐겨 먹었을 뿐만 아니라 전혀 다이어트를 하지 않았다.

 반면 양귀비는 얼굴 화장에는 매우 많은 신경을 쓴 것으로 보여진다. 양귀비가 평소에 사용한 화장품은 `옥홍고(玉紅膏)'였다.
후세 사람들은 그것을 `양태진옥홍고(楊太眞玉紅膏)'라고도 칭하였다. 관련 문헌에 의하면 이것은 `얼굴을 붉고 윤기있게 만들어, 바른지 15일이 지나면 얼굴이 홍옥(紅玉)처럼 된다'고 한다. 그것을 만드는 방법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살구씨를 물에 담가 껍질을 벗긴 후 갈아서 미세한 분말을 만든다. 이렇게 만든 행인가루를 감홍(염화 제일 수은), 활석분(탤컴 파우더)과 동일한 비율로 혼합하여 찐 다음, 용뇌(龍腦), 사향을 첨가하고 거기에 계란 흰자위를 배합하여 찐득찐득해질 때까지 잘 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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