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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기와 '이라나이'족
불경기와 '이라나이'족
  • 의사신문
  • 승인 2008.04.17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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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문화가 변할지도 모른다

수입차가 잘 팔린다고 언론에서 떠들지만 아직 거품이 많은 상태다. 국내의 수입차 시장은 불경기의 영향을 받을지 몰라도 아마 꾸준히 팔릴 것이다. 미국 시장은 가격을 할인하고 리베이트까지 주면서 `무한 경쟁'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 시장은 미국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소비자들도 이제 `무한 애국심'을 발휘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 수입차의 점유율은 상승하고 있다. 경쟁이 심화되면 거품이 빠지고 소비자들은 덕을 볼지도 모른다.

프리미엄급은 나름대로 수요가 있으며 그보다 저렴한 수입차들도 놀라운 경쟁력을 갖고 있다. 1∼2년 뒤면 토요타의 실용적인 중급차들을 쉽게 보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차들이 외국에서 잘 팔리는 것처럼 수입 차들도 국내에서 잘 팔릴만한 이유를 갖고 있다. 광고와 홍보 효과는 사람들이 다양한 차들을 선택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다. 사람들이 정말로 원하지 않더라도 집요할 정도로 자신들의 존재이유를 홍보할 것이다. 우리나라보다 몇 배나 긴 모터리제이션의 역사를 갖고 있는 해외 메이커들은 이런 일에 아주 능하다. 수요는 사람들의 머릿속의 상징을 조작할 수 있어 어떤 차들은 타보지 않더라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이것은 모두 메이커들의 집요한 세뇌공작의 일환이다. 사람들의 충성도도 한 몫 한다. 친숙한 차, 오랫동안 타본 차들에 익숙해지면 다른 메이커를 사용하기 두려워진다. A/S센터가 적으니 불편할 것이라던가, 부품값을 잘 모른다던가 등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소비자들을 내몬다. 또한 “적어도 이 정도는 타야한다”같은 중산층의 키치화 전략에 호소하기도 한다. 이런 모든 것들이 자동차 문화다.

하지만 요즘 이런 문화들이 바뀌고 있다. 소비자들은 예전처럼 비싸고 좋은 것에만 매달리지 않고, 자동차를 그저 하나의 생필품 정도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메이커들이 곤혹스러워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일본의 자동차 시장은 `이라나이(필요 없다는 뜻) 족'들의 출현에 의해 고전, 실제로 내수 판매가 부진하다. 소득이 높고 차를 살만한 계층인데도 필요 없다고 느끼는 계층이 늘어나는 것이다. 유지하기 불편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되는데 차는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변하고 있다. 또 소득이 별로 없는 젊은 층은 신차를 살 여유가 없다. 양극화가 일어나면 중산층은 줄게 돼 수요는 줄고, 결국 메이커는 손을 쓸 도리가 없는 것이다. 굳이 구입하게 된다면 크지 않은 차를 사서 부담없이 타고 다니는 인구만 늘어난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실제로 비슷한 현상이 보이고 있다. 렉서스나 BMW를 타는 지인들 중에는 다음 차종을 조금 편한 것으로 바꾸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은 예전에 프라이드나 르망을 타면서 프리미엄 차종을 꿈꾸던 386들이었다. 그런데 타보니 좋기는 하지만 정말 이런 장난감이 필요한 것인지 의문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차를 당장 다운그레이드하지는 않겠지만 다음 차종을 결정할 때까지는 많은 시간을 들이거나(차의 교환주기가 늘어난다), 다음번에는 프리미엄이 아니라 조금 더 실용적인 차종을 고를 수도 있다(이것은 몇 년후의 사회적 분위기에 좌우된다). 그리고 보수적인 의사들의 성격을 고려하면 아마 다른 직종에 비해 차들을 오래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의사들은 차들을 오래 타는 편이다. 소득분포상 의사들은 메이커들의 타깃에는 들어갔지만 사실 적극적인 소비자는 아니다. 이라나이족에 가까운 성향을 보인다. 그래서 잘 망가지지 않는 인기차종이 나타난다면 차들을 오랫동안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386이나 그 이상의 나이층은 차 말고도 돈을 쓸 일이 많아진다. 아마 무리하지 않고 합리적인 구매를 할 것이다.

세상도 변하고 있다. 몇 번이나 컬럼을 통해 적었지만 사람들의 머릿속에 깃든 소비의 미덕을 내모는 것은 환경주의자나 도덕론자의 주장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오르고 있는 기름가격과 R(Recession)의 공포 같은 것들이 근본적 원인이다. 이라나이족 같은 트렌드나 고령화 사회의 대두, 메이커들의 새로운 변신노력 같은 것들이 합쳐지면 칙칙하기는 하지만 아마 조금 더 합리적인 문화가 나올 것으로 보인다. 수입차들도 다운그레이드나 다운사이징을 하면서 합리적으로 될 것이고 우리나라 차들도 살아남기 위해 더 합리적으로 변할 것이다. 마초이즘이나 럭서리 또한 역시 다른 색으로 바뀔 것 같다. 그러면 우리는 어깨의 힘을 빼고 고급스러움의 정의를 다시 내릴지도 모른다.

안윤호〈송파 대광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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